신학서설
Methodology of Theology

조동호 목사


1. 神學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훈련을 통해서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며 신앙인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사명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앙을 위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이론적인 학문이며 실천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촉구하는 행동지침이다.

신학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을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 신학교의 전 과정을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대학과 대학원의 커리큘럼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대학간에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성서원어, 성서주석, 교회역사, 고고학, 성서교리, 변증학, 윤리학, 기독교 교육학, 설교학, 선교학 등 다양한 학문의 분야에 걸쳐서 교과과정을 짜고 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신학과목들은 크게 네 분야로 나누어 구별하게 된다. 이들 분야를 성서(주석)신학, 역사신학, 조직(이론)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이라고 부른다. 대학원의 교과과정은 더욱 분명하게 이들 네 분야로 구분되며, 전공도 이들 네 분야 중에 하나를 택하여 하게 된다.

성서신학이란 주석신학으로서 신구약 성서를 기록 당시의 원어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며, 성서 해석학, 성서 정경사, 고고학, 역사적 배경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역사신학에서는 교회사를 다루게 되는데, 사건 사고의 발생과 내용을 신학적인 측면에서 다루게 되므로 역사에 자신이 없더라도 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다. 세계교회사, 한국교회사, 신구약중간사, 에큐메닉스, 교단역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조직신학은 뒤에서 더 자세하게 언급될 것이므로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한다. 실천신학은 여러 가지 분야의 전공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교회성장학 분야, 선교학 분야, 기독교교육 분야, 교회음악 분야, 상담학 분야, 목회학 분야 등 다양하다. 아무튼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이란 앞서 열거한 모든 신학적 학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둘째, 조금 좁은 의미로서 신학이란 말은 전공분야로서의 신학 즉 조직신학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조직신학은 성서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에 대등한 말로서 교리학, 조직신학, 교리역사, 변증학, 종교철학, 윤리학 등을 다루게 된다.

셋째,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 신학이란 말은 조직신학 또는 교의학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보통 변증학 및 윤리학 분야와 함께 조직신학부의 세 개 전공분야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신학이란 말은 신학이란 말이 담고 있는 하나님(theos)과 학문(logos)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의 원뜻인 신론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론을 흔히 영어로 theology proper(신학 원뜻)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많은 신학의 뜻과 신론을 구분코자 함이다.

2. 組織神學

이제 조직신학의 의미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조직신학은 성서를 절이나 권별로 연구하기보다는 주제별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성서가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다루는 죄론 같은 특별한 주제를 체계 있게 연구하는 신학방법이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조직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의 위치(loci)를 차지해온 주제들을 다루게 되는데, 이들 주제들은 성서론, 신론, 인간론, 죄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조직신학을 성서신학 혹은 교의학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이들 성서신학과 교의학은 때에 따라서는 그 뜻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도 있는데 이때 성서신학은 성서의 특정부분 즉 구약신학 또는 바울서신 신학 등과 같은 연구를 말하며, 교의학은 성서이외에도 교회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천명된 신앙고백서들을 연구에 포함시킨다.

조직신학의 성공적인 시도는 반드시 성서의 통일성과 성서의 명백성이란 원칙 속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모든 성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 저술된 책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리고 성서의 저자들이 각기 다른 스타일, 어휘, 배경, 강조점들이 그들의 저술에 철저히 개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전체가 통일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전개된 사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해석한 믿음의 글 또는 신앙을 통한 삶의 고백으로 보는 경우에는 성서를 쓴 저자들이 역사나 과학적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기보다는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전한다고 보게 되며, 성서를 해석된 역사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의 행위를 믿음으로 전달한 역사로 보게 된다. 따라서 성서는 저자들의 자료수집, 선별, 해석, 편집의 결과이며, 수집된 자료들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을 신앙으로 교육하고 선교하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조직신학의 타당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저자별 신학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또 저자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삶의 자리, 저자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제 문제들, 그리고 저자의 신학적 관점과 기록 목적의 차이 등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용광로에 성서 66권을 모두 넣고 녹여서 죄론 따로 뽑아내고, 인간론 따로 뽑아 내는 식의 조직신학을 거부하고 저자의 신학적 관점과 기록 목적에 관심을 두고 마태신학, 마가신학, 누가신학, 요한신학, 바울신학 등으로 세분하여 저자별로 연구하는 성서신학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들 주제별 조직신학과 책별 또는 저자별 성서신학은 서로 적대 관계이기보다는 서로 보완적이고 필연적인 관계이다. 특히 성서신학은 조직신학을 위한 기초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비록 성서가 수많은 저자들과 수 세기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학적 관점에서도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모든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였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증거하는 통일성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의 언어로 된 체험적 신앙고백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무대에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서 그 드라마를 쓴 작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과 같으며, 또 관현악 연주에서 여러 연주자들의 각기 다른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을 듣게 되지만, 결국 작곡자 자신이 의도한 한가지 주제 음악을 듣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국 성서를 기록한 여러 저자들의 설교와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특히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보게 되며, 그 구원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관해서 알게 된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神學體系

신학체계와 조직신학은 다르다. 조직신학은 성서연구의 한 방법이며, 신학체계는 조직신학의 산물 즉 교리(dogma)라고 할 수 있다. 조직신학의 모든 노력이 신학체계를 위한 것도 아니며, 그럴 의도도 대개는 갖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설교자가 주제설교를 쓴다든지, 어떤 특정한 교리에 대한 성서 강의록을 쓸 때에 그는 조직신학을 하고 있으면서도 신학체계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세우려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급기야는 성서보다는 인간들이 세운 불완전한 체계에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신앙고백서들을 만들어 정통의 시비를 가리는 울타리 역할을 삼아 왔는데,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 되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울타리가 크면 큰 만큼 교리는 상대적이 되지만 교회연합이 쉽고, 울타리가 좁으면 좁은 만큼 교리는 절대적이 되어 교회분열을 조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질에 일치하고, 비본질에 자유하며, 모든 일에 사랑으로 관용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신학체계의 위험은 잘못된 출발점, 잘못된 성서 해석학적 원칙을 적용하여 내린  거짓된 해석에 인간을 묶기도 하고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는데 있다. 또 다른 신학체계의 위험은 이 잘못된 해석의 내용을 성서주석이나 신학작업의 울타리로 삼아 칼뱅주의, 아르미니안주의, 천주교회주의, 웨슬리안주의 등으로 이즘화 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주장이나 주의가 해석하는 사람의 지혜, 지식, 경험, 관심, 관점(가치관)의 차이에서 많이 생긴다는 점이다. 또한 자료에 권위를 부여하는 문제, 자료를 해석하는 원칙의 차이, 신학하는 방법의 차이는 필경 각기 다른 해석을 낳게 할 것이다(Cottrell, Jack. "Theology and the Church." Christian Standard. 1982. 2. 7).

4. 方法論

자료의 권위 부여 문제는 교단 분열과 교리의 비통일성의 주된 주범이 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서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성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 저술된 책이란 사실을 인정하여 성서의 통일성과 분명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서를 신앙인들의 믿음의 글 또는 삶의 고백, 또는 해석된 역사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의 행위를 믿음으로 전달한 역사로 보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성서의 절대성을 인정하여 오직 성서만을 믿음과 실천 혹은 신학과 윤리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는 한편, 종교개혁이후의 교리와 전통을 보수하고자 한다. 그러나 후자는 성서의 상대성을 인정하며, 성서이외에도 인간의 이성과 시대적 상황을 중시하여 교리와 전통을 보수하기보다는 시대성에 맞는 상황신학에 관심을 갖는다.

천주교회는 성서이외에도 교회전통과 교황의 권위를 동등하게 취급한다. 그밖에 사이비 교단에서는 성서이외에 몰몬경이나 원리강론 또는 대쟁투와 같은 책들에 성서 이상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와 같이 자료에 부여하는 권위에 따라 신학과 윤리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는 성서이외에 다른 것을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자료의 권위문제에만 신학의 분열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 해석학의 문제 또한 심각한 주범이다. 해석학적으로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삶의 정황을 철저히 살피고 저자의 기록의도나 목적을 고려한 다음 우리의 삶의 정황에 맞는 해석과 주석을 내려야 한다는 공통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救贖史)로 풀이하는 방법이 있고,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적용하여 성서를 풀이하는 방법도 있다. 구속사적 해석방법은 전통적인 방법으로서 기독론적 맥락에서 신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며, 역사적-비평적 방법은 역사비평 방법을 성서에 적용하여 본문, 자료, 언어, 구전양식, 문학양식, 편집내용, 주변 종교의 영향 등을 비평한다. 이밖에도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정황을 살피는 사회학적 성서비평 방법이 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또는 여성신학이 사회학적 성서비평 방법에 의한 신학이다.

성서의 기록된 내용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느냐, 아니면 단순히 신앙인들의 삶의 고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서신학의 방향이나 목적이 달라 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신학을 연역적으로 풀어 가면서 주로 개인의 영혼구원에 주력하는 경우가 많고, 후자의 경우는 신학을 귀납적으로 풀어 가면서 주로 사회구원에 주력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복음주의)의 경우에는 신과 인간을 수직선상에 놓고 신본위 신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고, 후자(자유 진보)의 경우에는 인간 대 인간을 수평선상에 놓고 인본위 신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전자의 경우는 교회의 사명인 봉사와 구제 및 사회참여를 통한 인간화 또는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수평신학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예배, 선교, 교육을 통한 인간의 영혼구원을 추구하는 수직신학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의 근본 목적이 전인구원에 있고, 인간의 구성이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도 영혼구원은 물론 육체구원(부활), 더 나아가서는 우주회복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신학방법론은 사실상 상호 보완적이며, 협조적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절대성을 기점으로 출발하여 연역적 신학방법을 사용할 때는 결국 상대성을 살펴야 하는 것이며, 상대성을 기점으로 출발하여 귀납적 신학방법을 사용할 때는 결국 절대성에 귀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영적해석과 문자적 해석 사이의 갈등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점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개념 하나만 보더라도 어떤 이는 무천년설, 후천년설, 다른 이는 전천년설 또는 시대구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인 해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이 있는 데, 대개 시대구분설을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많다. 성서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고, 영적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다. 문맥에 따라서 문자적이면 문자적으로, 영적이면 영적으로, 비유적이면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획일적인 방법의 적용은 언제나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구원의 본질이 아닌 천년설과 같은 문제는 인위적인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를 위한 시금석이 될 수 없다. 다만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학적인 해석 또는 견해를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분열을 획책할 때이다. 그러므로 학자간에 통일된 신학자료의 권위부여, 통일된 성서해석 원칙들에 합의를 이루는 일이 남겨진 과제이다.

5. 聖書觀

참고적으로 학자들의 성서관에 대해서 간단히 약술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복음주의 성서관과 자유 진보신학의 성서관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복음주의 신학은 합동신학교의 김명혁의 말대로, "종교개혁과 각성운동의 전통에 서서 초월적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권위와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체험을 강조하는 보수적 전통신학을 말한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과 성경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체험과 그리고 전도를 강조"하는 신학을 말한다.

그러나 자유 진보신학은 그 주된 관심을 초월적인 하나님이나 성서에 두지 아니하고 인간화라든지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악의 개선 등에 둔다는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과는 다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자유 진보신학에서는 성서를 신앙인들이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해석한 믿음의 글 또는 신앙을 통한 삶의 고백으로 보고, 성서가 역사나 과학적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기보다는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전하는 해석된 역사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의 행위를 믿음으로 전달한 역사로 본다. 따라서 성서는 저자들의 자료수집, 선별, 해석, 편집의 결과이며, 수집된 자료들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을 신앙으로 교육하고 선교하는 데 그 기록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이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권위에서 출발한 텍스츄얼리즘(textualism)이라고 한다면, 진보신학은 인간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 또는 그 문화와 역사 및 사회학적 상황에서 출발하는 컨텍스츄얼리즘(contextu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복음주의 신학이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신본위의 배타주의라면, 자유 진보신학은 성서가 주장하는 계시나 초자연적인 역사의 배타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인본위의 포괄주의 또는 종교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성서관에 대한 이들 두 그룹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우주관에서 비롯된다.

첫째, 복음주의자들은 이 우주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에서 유에로, 자유로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만드셨다고 믿으며, 이 우주의 주인은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며, 인간도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본다. 이 엄청난 우주를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비록 그가 초월적인 존재이시지만, 그의 전지전능하심은 유한한 인간들에게 그 분의 뜻을 전달하실 수 있으시며, 인간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인성 즉 지, 정, 의 및 관계의 능력은 대신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능케 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전달하실 메시지가 있으실 때에는 언제든지 그 분의 뜻을 그 분의 종들인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해서 계시하셨으며, 계시를 받은 종들이 그 분의 계시를 인간들에게 펜으로든지 혹은 설교로든지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성령께서 또한 영감으로 역사하셨으며, 성서가 그 산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성서는 절대자가 주신 절대진리이며, 인간의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믿는다. 물론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성서이외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신학의 자료로 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만이 신학의 규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자 하나님만이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행하라고 지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은 성서 속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은 이 성서를 절대진리로 믿고 연구하는 신학을 말하며, 성서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삶을 규범 짓는 절대 윤리를 주장함으로써 전통 보수신학을 지속시키고자 한다.

둘째, 신학자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자유 진보신학자들은 진화론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거나 그 영향을 받아 학문에 적용하고 있다. 신의 존재와 창조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의 역사를 6천년으로 본다든지, 문자적인 7일 창조를 믿지 않는다. 대진화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소진화 정도는 과학적으로 인정이 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신에 대한 사고의 발전, 유대교나 기독교의 발전,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윤리 가치관의 발전을 믿기 때문에 진리의 상대성과 상황윤리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진보신학에서는 인간의 문화 종교적 체험에 관심을 두는 범종교주의적 토착화나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사회 정치 경제적 체험에 관심을 두는 정치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에 그 초점을 맞추고 인간화와 인간해방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이 영혼구원을 통해서 인간화 또는 인간해방을 추구한다면, 자유 진보주의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개혁을 통해서 인간화 또는 인간해방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 본 진보 보수간에 성서관이나 우주관에도 절충의 요지가 없지는 않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주 팽창론이 대두되고 있고, 140광년 밖에까지 내다 볼 수 있는 집채만한 허불 만원경이 우주의 기원을 풀기 위해서 90분에 한번씩 지구궤도를 도는 고도의 과학기술이 발달된 시대이다.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신매매, 살인 및 자살과 같은 인간 경시풍조와 물신숭배, 이기주의의 팽창으로 야기되는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윤리관이 파괴되고 있는 파행적인 시대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보수신학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의 결여와 과학시대에 역행하는 폐쇄성에서 찾을 수 있으며, 생명을 물질만으로 인식하여 생명을 경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케 한 생명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진화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기원에 대한 분명하고 올바른 이해는 한 사람의 인생의 목표와 삶의 의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편견 없는 과학적 고찰과 성서해석은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상당수의 과학자들은 "확률적으로 볼 때, 단백질 하나도 우연하게 생겨질 가능성이 없고, 열역학적 법칙과도 화학진화가설은 상반되며, 종내(種內)의 소진화는 사실이지만, 대진화는 불가능하며, 화석자료가 진화모델보다는 각 종대로 창조되었다는 창조모델을 증거하고 있다"(김영길 외 26인. {자연과학} 생능, 1990. 460-471쪽)고 주장한다.

보수주의 성서관에도 변화가 주어져 비평신학자들의 성서비평을 수용하는 추세에 이르고 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성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을 그대로 믿고 수용하면서도 성서 저자들이 출애굽 사건이나 십자가 사건과 같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을 해석하고 전달함에 있어서 저자들의 언어, 경험, 자료의 수집과 편집은 물론 문화, 사회, 역사적 제약 속에서 이성적 의지적 판단을 사용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서가 비록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책이라 할지라도 각 문서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적 요소들은 무시될 수 없으며, 이러한 인위적인 요소들에 대한 성서비평이 필요할 뿐 아니라, 올바른 성서해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역사의식 속에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현대신학을 예언자적 신학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영혼구도에 전념하는 보수신학을 제사장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노선이 교차하는 선에서 바로 죄악이 다스려지고,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왕적신학이 형성되리라 믿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신학이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

6. 靈性

학문과 영성훈련은 신학과 신앙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경건히 없는 신앙생활이다. 현대신학에 대한 잘못된 수용으로 믿음은 식어가고 경건의 생활은 사라져 가고 있다. 물질이 풍부하면 할수록 기계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또한 지식과 정보가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면 나올 수록 인간의 영혼은 기계적 원리와 굴레 속에 종속되어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학문이 결국 인간의 문제를 풀어 인간에게 해답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일부 학문은 학문 그 자체로서 족할지 몰라도 철학이나 신학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학문은 인간의 육체적 문제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 그 자체로서 그 사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신학은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영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과 또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영적인 교제는 인간 문제를 푸는 필수적인 열쇠이다.

오늘날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영성의 재발견이다. 신학 없는 신앙이 무의미하듯 신앙생활 없는 신학은 더 더욱 공허하다. 신학은 인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인간답게 살고 전인적인 인격회복에 필요한 튼튼한 기초를 마련키 위해서 인간의 문제에 신학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신학은 바로 이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과 또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훈련을 통해서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며 신앙인의 믿음과 실천에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사명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앙을 위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이론적인 학문이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촉구하는 행동지침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신앙의 우위에 서지 못하며 반드시 상호보완적인 역할로서 끝나야 한다.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신앙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가되어 신자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영성은 신앙인의 거룩한 삶을 말하며, 명상, 기도, 찬양과 같은 예배행위를 통해서 나누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말한다. 영성은 신비적이며 체험적이며 주관적이다. 영성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생활의 진지함을 말한다.

신학은 정신적이며 귀족적이나 경건은 대중적이며 내면적이다. 목회자의 사명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제사장적인 역할이라면 목회자는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대중적이고 내면적인 경건의 생활에 익숙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학 없는 신앙생활은 이론 없는 실제를 말하듯 맹목적인 영성훈련이며 신앙 없는 신학은 메마르고 공허한 학문에 불과하다. 맹목적인 신앙은 율법주의 신비주의 혼합주의의 위험성이 있고, 영성없는 신학은 공허한 믿음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과 신앙이 상호보완적이지 못하면 언행일치의 신앙이 근본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신앙 없는 신학은 잘 꽂은 꽃꽂이의 꽃처럼 뿌리가 없는 아름다운 꽃과 같고, 인위적으로 만든 조화의 아름다움과 같아서 겉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에는 생명력이 없어 곧 시들어 버릴 꽃에 불과하며 벌 나비가 찾아들지 않는 조화에 불과하며, 지성적인 것 같으나 부정적이며, 비평적인 것 같으나 파괴적이며 구원을 외치나 멸망을 자초하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답고 지성적이며 비평적인 신학은 영성에 기초한 언행일치의 신앙이며, 신학이 공허한 개념과 전문적이고 추상적인 술어들로 가득한 사변에 기울면 몇몇 신학적 지성인들의 호기심은 자극시킬지 몰라도 일반 신자들의 욕구를 채울 수는 없으며, 인간 문제에 대한 전인적인 치유법으로서의 신학이 될 수 없다. 이 뿐만 아니라, 점점 지성화되어 가는 신자들에게 무조건 맹목적인 신앙생활만을 강요한다면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및 혼합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신자들의 신학적 욕구에 부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앙인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미신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또 경건과 실천적 신앙을 갈망하는 지성인이 늘어가는 이 때에 공허한 신학만으로는 그들의 빈 가슴을 메울 수 없으며,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신앙은 지성을 추구한다는 말과 같이 신학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하였고,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딤전 4:7-8) 고하였다. 우리가 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바울은 13편의 주옥같은 서신을 통해서 그의 해박한 신학을 논하였고, 특히 그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신학과 윤리 즉 믿음과 실천에 대해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성령을 주신 목적이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삶 즉 거룩한 삶을 통한 성장을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할 우리 신학도들은 학문을 위한 학문, 이론을 위한 이론, 신학을 위한 신학으로 끝나지 말고 인간의 삶에 적용되고 실제에 응용될 수 있는 학문, 즉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생활에 기초가 될 수 있는 신학을 연구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신학은 결국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인간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하나님을 통해서 성서를 자료로 삼아 해결하고자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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