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비평: 해석에 있어서의 신구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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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비평: 해석에 있어서의 신구비평
Realgeshichte: Old and New in Interpretation(Dr. Lewis Foster)
http://kccs.pe.kr/thesis056.htm
글 : *Dr. Lewis Foster
번역 : 조동호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이해하려면 해석의 길(路)을 따라 가야한다. 그런데 이 여행에서 수많은 루트, 다양한 출발지점 그리고 도착지점들은 여행자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본 연구의 목적은 금세기에 소개된 다양한 해석학파들의 주장을 살펴보고, 우리 세대에 필요한 (1)기록된 성경의 의미파악과 (2)그 말씀의 신뢰성에 대한 확신의 강화, 그리고 (3)그 말씀의 진리전달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서 또 하나의 해석의 길(路)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해석의 길(路)이 놓여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길을 놓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재고의 가치가 없다는 반대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금세기 학자들의 성경연구논문들에 부정적인 비평이 너무 지배적이었다는 것, 그래서 진보신학자들은 물론이고 보수신학자들의 관심조차도 논쟁의 소지가 많은 주변분야들에 집중되었다는 것, 그리고 성경가르침의 중심이 강조되기보다는 오히려 외곽으로 밀려났다는 점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예수의 말씀들이 초대교회의 신앙(창작)으로 간주되었고, 문학장르에 대한 관심이 성경말씀의 내용에 대한 의지(excitement)를 꺾었으며, 형식과 구조의 강조는 그림의 모습(setting)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틀이 그림의 모습을 덮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작금의 이런 딜레마를 극복해 보려고 시도한 본 연구에서의 제안은 있는 그대로의 출발이자 개요에 불과하고, 충분하게 다룬 것은 전혀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 제안은 하나의 해석의 길을 놓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하나의 방향지시를 하려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제안들이 확고한 형태로 제시된 유일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 방향에 동의할 것이란 기대와 지금 마음에 그린 설계보다 훨씬 더 좋은 길들을 놓게 될 것이란 희망에서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신약성경해석에의 20세기 접근방법들이 만들어 놓은 도로망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강조점이 바뀌는 곳을 볼 수도 있고, 상이한 진로들과 추구되는 목표들을 추적할 수도 있으며, 또 본 연구의 제안에서도 다시 등장하게 될 다양한 지점들을 관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자신의 출발지점을 떠나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서 여행을 시작하게되면, 어떤 지점이나 혹은 또 다른 지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들의 길들, 이를테면, 슈미에델(Schmiedel), 불트만(Bultmann), 마르크센(Marxsen)과 같은 급진주의 학자들(주1), 혹은 벌키트(Burkitt), 캐드버리(Cadbury), 쿰멜(Kümmel)과 같은 진보주의 해석가들(주2), 제이트린(Zeitlin)과 산드멜(Sandmel)과 같은 유대주의 권위자들(주3)은 물론이고, 램(Ramm), 미켈센(Mickelsen), 마솰(Marshall)과 같은 보수주의 대표자들(주4)이 놓은 길들과도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기존의 해석학들의 방향을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에 본 연구에서 시도하려는 새로운 해석학의 원리들과 방법론이 설명될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 이 방법이 어떻게 성경해석에 적용되어질 수 있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본 연구에는 새롭게 주장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모든 방법이 이전에 이미 다 나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별과 강조들만은 다르다. 그 목적은 그 선별과 강조들 가운데서 사건과 성경말씀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한 방법, 즉 독자의 삶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적용되어질 수 있고, 독자가 택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해석이론들의 미궁사이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다리로서 혹은 그것들을 통과하는 길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는 하나의 접근방법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Ⅰ. 성경해석에의 20세기 접근방법들
1. 비교종교비평(Religionsgeschichte)
세기가 바뀌면서 여러 세계종교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나타났다. 성경분야에서 특별히 기독교가 시작된 시기와 장소에 근접한 종교들이 기독교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연구되어졌다.(주5) 유사성이 발견되면 즉시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가 그것들을 타종교에서 빌려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밝히고 있는 특별계시를 부정하는데 이용되었다. 점점 더 많은 이론들이 기독교신앙들을 단순히 헬라세계의 산물로 설명할 목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종교의 권위자인 노크(A. D. Nock)가 짧지만 매우 중요한 연구서를 출판하면서 반환점에 접어들게 되었다.(주6) 진보주의 학계가 종교학역사 분야에 종사하는 그들의 동료로부터 그들의 이론들을 확정짓는 결과를 기대했던 바로 그 때에 노크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들을 선포하였다. 실제로 노크는 그의 연구에서 유사점들을 발견은 했지만, 그것들은 아주 중요한 분야들에서는 빌려왔다는 점을 수용할 수 없는 그런 성격의 것들이었던 것이다. 노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 신앙(cultus)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독교가 주변의 종교와 많은 부분 공통점을 갖고는 있었지만, 기독교발전에서 보여지는 원동력들(driving forces)은 대부분 자체 내에서 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발전은 진공상태(in vacuo)에서 이루진 것이 아니라, 헬라세계의 배경에서 이루어졌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연구하여 얻은 증거는 기독교가 상당부분 빌려왔다는 가설을 정당화시키지 않는 것 같다. 만일에 그 증거가 그와 같은 주장을 정당화시킨다해도, 새로운 믿음의 발전은 여전히 개인적일 뿐 아니라 자각적으로 개인적인 어떤 것의 발전이었을 것이다.(주7)
왜 기독교가 종교들의 갈등에서 성공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에서 노크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기독교는 일종의 신앙(cultus)을 제시하였다. 그 신앙 안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와 형제애의 욕망이 채워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수단을 깨닫게 하는 유익을 나누었다. 구세주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에게는 아주 공격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방어할 필요가 있었던 전설들로 꽉 채워진 신화적 인물이 아닌, 신성이 부여된 최근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뛰어났다.(주8)
환원하면, 노크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쓴 수많은 옛 기록들을 함께 연구함으로서 역사적으로 참인 예수가 처음부터 기독교를 이해하는 중심이며,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타종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님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2. 자료비평(Quellengeschichte)
학계의 관심은 바꿨다. 만일 자기 자신이 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역으로 여행을 하고있다고 상상한다면, 20세기의 평범한 학자(Mr. Average Scholar)의 루트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승차하는 노선지도를 읽는 지점(Reader's Point)에서 지하철을 탔고, 만국역(All-Nations' Station)에서 내려 그곳에서 오랜 기간 비교종교비평(Religionsgeschichte)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타고 노선을 따라 진행해 보기로 했고, 그도 열차를 탔다. 도중에 그들은 본문역(Text Station)을 지나쳤다. 거기에서는 거의 몇 사람 내리지 않았다.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가 그 지역을 매우 철저하게 다루었고, 다른 사람이 그곳에서 보탤 것을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역도 역시 지나쳤다. 그 곳에서는 성경의 저자들을 다루어야했다. 그 역에서 승차한 몇몇 사람이 일부 저자들을 부인하였지만, 사람들은 다음 역의 간판들, 즉 일부 성경에 사용된 자료들에 더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이 연구에 자료비평(Quellengeschichte)이란 이름이 붙여졌다.(주9)
여기서 자료비평 학자들은 주로 공관복음서의 유사성을 연구하였다. 사중복음서가 버림을 받았고, 두 자료설 즉 초기 마가와 "Q"(Quelle, 자료)로 이름 붙여진 가설문서가 부각되었다. Q자료는 마가복음에는 없고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모두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유사한 자료를 언급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차이점들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한 저자가 또 다른 저자로부터 복사했다고 볼 수가 없는가 하면, 다른 한편 유사성이 너무 커서 그들이 피차 독립적이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주지하는바 대로,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Q자료가설이 만들어진 것이다.(주10)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는바 대로, 만일에 이것이 금세기 신약성경학계가 생산한 가장 확실한 결론이라면, 이것은 한 세기의 업적에 관한 하나의 슬픈 해설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주11)
자료설이 주장되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주12) 결과적으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희망을 버렸고, 그 자리를 초기교회의 신앙(창작)들에 근거해서 만든 문학적인 재구성으로 채웠다.(주13) 결국 그들은 예수가 그들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갔음을 깨달았을 때, 역사적 예수는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로 남아있는 한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선언하였다.
3. 양식비평(Formgeschichte)
만일 학자들이 지하철 노선이 시작되는 곳을 향해 전승역(Tradition Station)에까지 더 나아간다면, 무엇인가 더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이것은 정경인 복음서 배후에 있는 문서자료들보다도 더 오래된 복음서의 상태일 것이다. 세계 제1차 대전의 포성이 멎은 후, 디벨리우스(Debelius)는 해석자들의 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새로운 접근방법에 발을 들여놓았다.(주14) 만일에 복음서 이야기들 가운데 낱개의 블록들에서 전승자료의 양식을 구별해 낼 수 있다면, 그 이야기가 "설화"(tales) 바구니에 들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전설"(legends)이나 "신화적 해석"(mythological interpretation) 바구니에 들어가야 하는지, 혹은 그 밖의 다른 식별 가능한 양식 바구니들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불트만(Bultmann)은 자신의 바구니들을 디벨리우스와는 다르게 이름 붙였으나 양식비평(Formgeschichte)에 대한 동일한 방법론을 주창하였다.(주15)
4. 편집비평(Redaktionsgeschichte)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또 하나의 부름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자는 전승역이 시발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고, 전승역에서 내려 찾고자했던 전승연구도 마쳤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이 시발역으로 가서 실제로 무엇이 그곳에서 말씀되어지고 행하여졌는가, 즉 신약성경이 말하고있는 실제로 산 사람들과 실제로 일어난 정황에의 구심점에로 옮겨 갈 것으로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은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갔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신앙보다 더 깊이 꿰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시발역에서 실제로 무엇이 말씀되어지고 행하여졌는가를 결정할 수 없다고 들었다고 했다.(주16) 그래서 그들은 열차에 올라타 시발역과는 반대 방향, 즉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향하였다.
이번에 그들은 몇 년 전에 그대로 지나쳤던 저자역(Author Station)에서 멈췄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복음서의 저자들을 저자들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료역과 전승역에서 모은 지식으로 인해서 복음서의 기록자들을 저자들이 아닌 편집자들이라 하였고,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마지막 손질한"(the finishing touches) 손 또는 손들이라고 하였다.(주17) 그들은 지난번 거쳐온 자료역에서 공관복음서의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유사성을 강조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차이점들이 빛을 보게되었고, 이 개개의 차이점 속에 편집자의 독특한 신학이 담겨있을 암시가 발견된다고 했다.(주18) 각 권의 공관복음서들에서 이들 차이점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저자들은 편집자들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5. 구조분석(Structural Analysis)
일부는 편집비평역(Redaktionsgeschichte)을 떠나 소홀히 취급했던 본문역(Text Station)으로 여행하였다. 이들은 주된 연구로 헬라어 본문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기록문서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평행구조들을 찾기 원했고, 특별히 고안한 방법으로 유사점들을 찾고자 했다.(주19) 그리고 이들 구절들이 조합이 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으로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연구는 헬라어 사본을 읽거나 헬라어 본문을 결정하는 작업들과 비교해서 본문 그 자체의 연구로 불려질 수 없다.(주20) 구조분석가들의 접근방법은 전동차와 고압선으로 연결되는 스푸르선(spur line)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구조분석은 제안된 의미를 식별해내기 위해서 자체의 전문 용어들을 필요로 하는 매우 어려운 학술용어들과 과정들을 발전시켰다.(주21)
6. 의미론(Semantics)
몇 개의 스푸르선(spur lines)들이 본문과 관련해서 급히 놓여졌다. 한 가지 접근방법은 "의미"(meaning), 즉 단어들의 단순한 기본의미가 아닌 어근의미를 다루어야 한다. 구절의 문맥적 의미는 낱개 단어의 발전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이 발견된다.(주22)
7. 수사학(Rhetoric)
또 하나의 두드러진 접근방법은 고전 수사학아래에 있는 이론적 개념들의 연구와 함께 시작되고, 수사학비평의 적용을 위해 다른 범주들을 계속해서 식별한다. 수사학적 단위를 정하고 나면 그 단위가 갖고 있는 수사학적 상황을 정하고, 다음에는 수사학적 문제, 마지막으로 자료의 배열을 정한다.(주23) 혹자가 신약성경의 수사학에서 발견되는 가능한 설계를 잘 알게되는 반면, 진리들을 받아드리는 힘은 빨리 커지지 않는다.
8. 워드 파워(Word Power)
에벨링(Ebeling)은 어휘들의 또 다른 면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어휘들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묻는다고 그것들의 본질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무슨 영향을 주는가, 그것들이 무엇을 지속시키고 있는가를 물음으로서 그 어휘들의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주24) 그러나 이 말속에 나타난 관심은 신약성경의 본문을 보는 것이고,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독자의 기원 속에서 진실로 드러나는 것이 그를 위한 진리가 된다. 이런 형태의 접근방법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만드는 노력을 통해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주25) 실제로 좌절감은 역사가 해석에 제한될 때에 일어난다. 해석학의 이런 형태 속에서 한 구절이 말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방법, 즉 그 구절이 개인을 선발하고 움켜잡도록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본문은 살아있어야 한다."(주26)
티셀톤(Thiselton)은 여기서 위험성을 지적한다. 성경의 어떤 진리들은 강조하고 나머지는 완전히 생략해버리기 때문에 너무 주관적이고 너무 선별적이라는 것이다.(주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신약성경을 덜 사실적이 되게 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적어도 현재는 그것을 더욱 사실적이 되게 하는 움직임이다.
에벨링은 "케뤼그마는 . . . 인간 실존에 관한 설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일어났던 것에 대한 증거이다."(주28)고 주장하였다. 이 접근방법은 어휘들 자체와의 근접한 관계를 요구한다.
9. 본문(The Text)
한편 중요한 본문역(Text Station)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져 왔다.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의 업적이 도전을 받고 있다. 신약성경 사본들의 대다수가 중세기에 필사되었고, 일반적으로 더 초기 시대에 발견되는 다양한 본문 형태와는 다른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본문 형태로 분류되어진다. 왜 초기 사본들은 다양한 반면, 후기 사본들은 더욱 통일성을 보이는가? 만약에 중세사본의 통일성과 다수보존이 원본에 가깝기 때문이라면, 본문 형태들이 그렇게 다양했던 초기 시대에는 그것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것은 원본기록형태에 가급적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참된 본문연구이다.(주29)
10. 신해석학(The New Hermeneutics)
실존주의자들은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다. "이 구절이 지금 여기서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적용에 유익한 목표이다. 그러나 이 접근방법은 너무 자주 하나의 지름길로 사용되어진다. 첫 번째 중요한 질문을 무시할 수 없다. "영감 받은 저자가 본래 의도했던 의미는 무엇인가?"(주30)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우리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적용할 준비가 완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철노선을 따라 오고가며 이루어진 이들 모든 여행들에서 무시되었던 한 역에로의 여행을 요구한다. 첫째, 시발역이 연구의 공식초점에서 회피되었다. 성경을 믿는 개인들은 성경 본문의 말씀들과 진리들을 항상 신뢰하여 왔다. 그들은 이 역을 거리낌없는 방법 속에서 다년간 이용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홈베이스를 절대 떠나지 않는 자들로 비판을 받아왔다.
이전 세대들이 사용했던 오랜 해석방법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여행자는 노선을 따라 모든 역을 여행할 수 있고 또 여전히 시발역을 이용할 수 있는가? 여행자는 홈베이스를 떠나 멀리 여행한 후에 이 시발역에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그 메시지를 노선 다른 끝에 있는 독자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본 연구가 제안코자 하는 사실비평(Realgeshichte)의 역할이다. 시발역에서 사실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그 메시지를 노선지도를 읽는 지점(Reader's Point)에로 가져가는 역할이다.
Ⅱ. 사실비평(Realgeshichte)
1. 용어
'사실비평'이란 이름을 택하게된 동기를 밝히고자 한다. 어떤 이는 "독일어 이름을 붙인 이유는 그 이름이 다른 독일어 비평용어들처럼 들리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영어에는 성경해석이 안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매우 적절히 함축하고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비평(Realgeshichte)이란 용어가 갖고있는 뉘앙스들을 검토해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또 어떤 이는 "이 단어를 이름에 붙인 이유는 성경의 무류성(infallibility)와 무오성(inerrancy)을 믿고 있고, 선험적으로 성경이 모두 사실이고 참이다 고 믿기 때문이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을 무류하고 무오하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확신하지만, 증거나 생각도 없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단순히 그렇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은 성경의 주장들과 도처에서 확인된 증거를 수용한다. 그렇다. "사실"(real)이란 말은, "신화"(myth)와 "편집자"(redactor)란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연상시키듯이,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본인은 긍정적인 접근방법과 이 점과 관련해서 본인의 입장을 지시하는 용어를 선호한다. 하지만, 증거에 대한 검토를 배제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용어 선택의 이유는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사실비평이 참된 해석의 최종적인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선택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이것도 아니다. 사실비평은 확립된 해석방법 또는 최종적으로 완성된 접근방법이 아니다. 사실비평은 의도된 것을 분명하게 할 수 있도록 한 앞서의 몇 가지 제안들과 관련해서 붙여진 호칭일 뿐이다.
이 이름을 고른 이유는 "사실"(real)이 들어가 조성되는 몇 개의 합성어가 갖는 적적한 의미들과도 연관이 있다.
(1)사실백과사전(Realenzyklopädie)
이것은 포괄적이고 철저하고 전체적인 백과사전을 표시하는 복합어이다. 사전이나 백과사전이 도움은 되지만, 사실백과사전(Realenzyklop?ie)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상세하게 취급하는 방법으로 모든 주제를 다루도록 편찬된 것이다. 해석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문맥, 즉 구절의 문맥뿐 아니라 전체 서신 혹은 전체 복음서의 문맥, 또 책의 문맥뿐 아니라 전체 신약성경 또는 전체 신구약성경의 문맥과의 합의이다. 아직도 글에 있어서 더 넓은 때와 장소의 문맥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주석은 역사와 철학, 사회학과 심리학과 같은 다른 인접학문의 훈련을 요구한다. 진리는 어떤 분야에서 그것이 발견되든지 간에 진리를 해방한다. 사실비평의 목표들은 한 구절의 이해에 필요한 충만하고 포괄적인 접근방법을 포함한다.
(2)사실정책(Realpolitik)
"사실"과 "정책"의 복합은 일부 좋은 면과 나쁜 면에서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정황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조정테이블에서 사용되어진 용어이지만, 불행히도 폭력과 관련되어져 있다. 다른 한편, 그것은 현실적으로 문제를 보는 것과 관련이 있지 이슈의 모든 면을 고려하지도 않고 협약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심을 알아주기 바라는 것과 관련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자를 위해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여기에 포함된다. 해석자는, 그것들이 문학적 형식이든, 신학적 함축들이든, 역사적 재구성들이든, 혹은 철학적 전제들이든지 간에,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성경의 어록이나 정황을 취해야지, 이론에 맞추려고 그것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연구는 기록될 때 의도됐던 그대로 구절을 취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져야한다. 이것이 사실비평이다.
(3)사실지식(Realerkenntnis)
독일어 Erkenntnis는 "지식" 또는 "이해"를 뜻한다. 사실(real)이란 말과 합하여져서 그것은 가상적인 것들과는 반대로 실제적인 것들의 사실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지난 50년 간 해석학에서 삶의 정황(Sitz im Leben), 즉 당대의 참 삶의 배경과 성경이 기록된 장소의 중요성이 종종 어필되었다. 성경이 기록된 참 삶의 정황에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주 우리 자신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서 비롯된 철학들과 형식들이 성경본문 위에 첨가되었고, 소위 중요하다는 바로 그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무효화시켰다. 사실비평은 성경의 기록을 실제로 발생된 신뢰할만한 이야기로, 원저자의 의도대로 다루고자 한다. 사실비평은 시도 때도 없이 문자적 해석을 본문에 적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원저자가 문자적으로 썼으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비유적으로 썼으면 비유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사실비평은 저자가 의도한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그가 의도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불확실하게 나타나는 영역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주제넘게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4)사실가치(Realwert)
사실(real)의 또 하나의 중요성이 부동산의 영역에서 보여진다. 금전의 가격은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에 따라 오르고 내린다. 그러나 부동산에 있어서는 소유지의 사실가치(Realwert) 즉 실제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가격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성경해석에 도움이 되는 적용은 평이하다. 성경의 각 부분들에 비교 사실가치를 표시할 것이 아니라, 성구의 의도된 강조와 오늘 우리의 삶에 가장 좋게 적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도록 힘쓰면서 성경을 연구해야한다. 그 가르침의 사실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사실비평의 이 단면은 성경에서 발견된 강조들을 결정하고 이들 강조들을 지키려는 시도를 말한다. 그것을 함께 모으는 작업의 밑바닥에 놓인 모티브들을 찾는 것은 사실가치(Realwert)의 일부분이다. 차례로 책의 순환 주제들과 개개의 성구들과의 관계는 그 부분들의 진가를 끌어올린다. 표면아래 있는 이들 흐름을 발견하는 것은 그것의 역사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의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2. 방법론(The Methodology)
이 용어 사실비평(Realgeshichte)은 해석의 출발점, 목표, 혹은 방법론을 암시하는가? 진실로 이 세 가지 모두가 사실(real)의 개념과 조화를 이룬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이 실제로 말하여지고 행하여졌는가에 있다. 저자들의 기록과 계획과 목적의 실제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의 삶과 개입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의 중요성 또한 사실이 되어야한다. 사실비평은 사건발생에서 실제적인 것, 기록에서 사실적인 것, 그리고 적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을 찾는다.
우리가 제안하는 이것을 행하는 방법은 본문에 대해서 질문들을 묻고(주31), 우리가 의미를 이해하고, 신뢰성여부를 알아보고, 적용하는데 도움을 줄 범례들로 그 결과들을 나누는 보편적인 절차를 따르는 것이다. 양식비평(Formgeschichte)이 자료를 설화, 전설, 신화 등의 이름을 붙인 각각의 바구니들로 나눈 것처럼,(주32) 우리도 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 예상치 못한 사실(the unexpected), 핵심 메시지(the key message)로 이름을 붙인 바구니들로 구분할 것이다.
이들 범례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한 가지 간략한 예를 들어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질 것인가를 설명하고, 좀더 분명한 정의를 내릴 것이다. 예수께서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야기가 있다(눅 2:41-5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설명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때와 장소에 아주 잘 들어맞기 때문에 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이 풍부하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족여행(주33), 유월절 준수, 열두 살 말엽에 맞는 유대소년의 삶의 이정표,(주34) 율법학자들과 그들의 성전에서의 가르침, 요셉과 마리아의 관심, 이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 배경을 제공하고, 당대에 경험들을 반영하는 참된 이야기라는 확신을 준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로부터 예수의 떨어짐, 부모들이 그를 찾는데 걸린 긴 기간, 그들이 그를 떼 놓았던 장소와 때, 마리아의 꾸중과 예수의 대답과 같은 예상치 못한(the unexpected) 요소들도 있다. 예상치 못한 목록들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의심나게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사실의 특성이 현실감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강하게 한다.
그리고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어떤 이는 조숙한 아이로서 후에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를 예시하는 예수의 사진을 가리킬는지 모른다. 다른 이들은 에피소드의 뒷부분 2장 51절에 기술된 대로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예수의 됨됨이를 강조할는지 모른다. 이런 지적들이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지 몰라도, 그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아니다. 사실가치(Realwert)는 마리아의 꾸중에 대한 예수 자신의 답변에서 나타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누가는 독자들이 예수께서 이렇게 일찍 어린 때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그의 답변에서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할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사적인 의무와 인간의 권위에 자유롭게 답할 수 있는 궁극적인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누가의 기술이 성전의 장면에서 어떻게 한정되어있는가를 주목하라. 누가는 예수께서 율법교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거나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가는 단순히 예수께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였는데, 그곳에 있었던 자들이 그의 대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무언가 사실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있고, 그것의 진실들은 독자들에게 믿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누가는 1장 4절에서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다."고 썼다. 가족의 예를 보라. 하나님의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을 보라. 아들이 돌아가 의무감을 가지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라.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
사실비평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1)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을 찾아라
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은 사실적이고 진실한 것으로 드러난 무엇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만일 "사실"대신에 "들어남"을 강조하게되면 잘못될 수 있다. 사실비평에서 이 용어사용은 성경의 말씀들과 사건들이 기록된 때와 장소에 얼마나 잘 조화되는가를 뜻하는 것이다. 기술내용이 당시의 배경에 조화가 되면,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는 믿을만한 게 된다. 예수는 복음서 이야기에서 로마의 정치인이나 아테네의 철학자처럼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지상생활을 했던 때와 장소의 정황(context)을 반영한다.
벌키트(F. C. Burkitt)는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있을 법한 사실을 강조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예수와 헬라의 철학사상을 결합한 옥시린쿠스(Oxyrhynchus) "예수의 어록"에 대조시킨다.(주35) 비록 벌키트가 성경의 무류성(infallibility)을 수용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공관복음서를 일어났고 말씀되어진 것들을 기록한 역사적 이야기들로 본다. 벌키트는 슈미에델(Schmiedel)이 마가복음 4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복합자료설들을 억측하는 곳에서 그의 회의론을 혹평한다.(주36) 그는 "나는 모자이크 작업(슈미에델의 이론들)으로 이루어진 이들 정교한 노력들에서 있을 법한 사실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을 시인한다."(주37)고 결론지었다.
기독교 연구로 명성을 얻었던 유대주의 학자 산드멜(Sandmel)은 복음서의 있을 법한 사실에 관해서 비슷한 결론들에 도달하였다. 복음서 이야기들이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높고 총체적인 신뢰성" 때문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한 내용의 때와 장소에 저자(마가)가 있었음이 틀림없다.(주38)
캐드버리(Cadbury)는 젊음을 방대하고 학술적인 {초기 기독교}(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Foakes-Jackson and Lake) 집필에 보낸 후에, 늙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유대인들, 로마인들, 헬라인들,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들의 물질과의 관계에서 얻어낸 정보를 자세하게 적지 않고 간략하게 요약한 작은 부피의 책을 한 권 출판하였다.(주39) 머리말에서 그는 그가 발견한 것들에서 변증자료를 제공하려는 어떤 동기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대단한 진보신학자이다. 그러나 그가 평생토록 사도행전연구를 마친 후에 발견한 것들은 그로 하여금 기록된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현실성을 발견하게 하는 있을 법한 사실과 자세함을 강조하게 하였다.
한 구절에서 있을 법한 사실을 세우는 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도움을 준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예수를 그의 사실적 배경에서 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복음서 이야기의 저자들이 후기 자료들을 첨가하거나 예수의 입에 그의 말이 아닌 말씀을 담았거나 후기의 관심들을 집어넣지 않았다는 확신을 오늘의 독자에게 준다. 그렇지 않으면, 있을 법한 사실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있을 법한 사실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의 신뢰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더 넓은 의미에서 있을 법한 사실은 이들 복음서 진리들을 오늘의 "삶에 참되게" 적용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2)예상치 못한 사실에 주목하라
모든 주제문제가 있을 법한 사실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가? 독자는 당대의 사상과 문화의 특징에 반대되는 자료를 발견하는가? 참으로 그렇다. 복음서 이야기들은 때와 장소의 자연스런 흐름에 반대되는 예상치 못한 사실들로 가득하다. 과거에 "진실로"--요한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주40)로 번역된 예수께서 사용하신 도입감탄사에 관한 연구는 흥미롭다. 사실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주의력을 집중시키고자 하실 때에 진술을 끌어들인다. 또 특별한 권위를 주장하시기 위해서 그 말들을 사용하신다. 사실이다. 이어지는 문제는 변함 없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사용된 "진실로"로 시작된 모든 구절들에 공통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이어지는 주장은 대중적인 생각과 반대로 흐른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사실을 단언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종종 시대 흐름에 거슬린다.
상기한 내용을 언급한 기사에서 슈미에델(Schmiedel)은 예수의 생애에서 하나의 말씀에서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는 진술과 한 가지 행동(사건)에서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는 진술의 역사성을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위 슈미에델의 핵심구절로 알려진 몇몇 구절은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주41) 아이러니컬하게도 슈미에델이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인 그 진술들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구절들이 예상치 못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진술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이들 각각의 진술들은 예수의 인성에 이롭지 못한 것들이거나 예수의 인성을 제한하는 것들이었다. 그 진술들은 예수를 신성(영웅)시 하지 않았던 것들이기 때문에, 그 진술들이 꾸며진 것들일 리가 없다. 그 구절들은, 예를 들면, 인자는 그가 돌아올 날과 시간을 모른다(막 13:32). 예수의 친척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막 3:21). 예수는 나사렛에서 권능을 행할 수 없었다(막 6:5)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즉 단지 예상치 못한 것, 찬사가 없는 것, 꾸며낼 이유가 없는 것만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드린다는 점에서 거의 회의적이다. 그러나 독자가 예상치 못한 사실을 찾고, 또 그것의 역사성을 존중하는 이 해석방법에서 출발했다면, 왜 예수에게 이롭지 못한 예상치 못한 사실에 그것을 제한하는가? 왜 다른 예상치 못한 사실들에는 마찬가지로 제한하지 않는가? 만약 그 진술들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이었다면, 그것들은 꾸며지지 않았을 것이고 첨가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실을 어울리지 않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거기에 싣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최상의 또는 유일한 설명일는지 모른다. 즉 예상치 못한 사실이 그런 식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실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direction)을 고집하는 것은 있을 법한 사실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던져버리는 것이 될는지 모른다. 어떻게 독자가 있을 법한 사실에 또 그 이야기가 신뢰할만하다는 증거를 여기에서 찾는 것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서 동시에 예상치 못한 사실에 또 사실이 그 기록에 녹아있다는 지시를 여기에서 또한 찾는 것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때때로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만 가능하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 두 가지 방법의 결합만이 실제의 현실성을 확신하는 가장 강하고 가능한 근거로 만든다. 있을 법한 사실 하나만 가지면, 그것은 때와 장소에 조화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꾸민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혹은 예상치 못한 사실 하나만 가지면, 그것이 역사와 이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 방법을 결합하면 그것이 실제로 있었다는 그런 식의 가장 분명한 그림을 갖게 된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유대세계는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메시아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그가 어떠한 분일 것이라는 개념들을 갖고 있었다. 때가 찼고, 장소도 옳았고, 있을 법한 사실이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어느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를 꿈꾸었겠는가? 그들은 왕국을 기대하였으나 예수께서 가르쳤던 그런 왕국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있을 법한 사실과 예상치 못한 사실의 결합이다. 이 결합 속에 있는 진리는 수세기를 거쳐 받아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숀필드(Schonfield)는 이 결합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다.(무42) 그는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메시아로 내세울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 한 모든 일은 구약성경을 연구하여 의도적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메시아 예언들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주43) 심지어 이 십자가의 처형도 약물로 살아있도록 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군인이 창으로 찌르는 바람에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고, 예수는 죽었다고 숀필드는 억측한다.
그러나 숀필드가 생각지 못하는 것은 만약 예수께서 자기가 메시아였다는 것을 백성에게 믿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보았다면, 백성이 기대했던 방법으로 예언들이 성취되도록 진행했을 것이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속이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그것은 그분의 부활만큼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실의 실재가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매 순간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과 항상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일정하지 않은 모든 차이들은 신성한 것이고, 매끄러운 모든 있을 법한 사실들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사실에 제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주어진 시기의 문화와 같은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방법들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독자는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상치 못한 사실을 충분히 기대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예상치 못한 사실들의 어떤 것들은 순전히 인위적인 것일 수 있다. 복음서 이야기들에서 깜짝 놀랍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다가올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으냐고 서로 다투었고, 시기적으로 가장 나쁜 때에 그렇게 하였다. 이야기들은 제자들이 밝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왜? 왜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안되었는가에 관하여 많은 설명들이 제시되었다.(주44) 그러나 어떤 설명도 사실비평이 단순하게 그것이 있었던 사실 그대로이며, 이야기되어진 그대로이다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다.
(3)핵심 메시지를 결정하라
사실비평에서 있을 법한 사실과 예상치 못한 사실이외에도 각 구절에서 "핵심 메시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 메시지를 결정하라는 문구는 주석에서 몇 가지 관심들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어진다.
(a)중심 진리
만약 독자가 구절의 주목표(thrust)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 구절의 각각의 부분들을 적절하게 잘 해석해 나갈 것이다. 대개 중심 진리는 자료의 문단 한 곳에 요약되어져 있다. 비유가 한 가지 중심 교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 다른 단락들 또한 일정한 곳에서 그 단락들의 결론을 결정하는 기본 근거가 되는 단서들을 제시한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잃지 않고서는 구절에서 생략될 수 없는 필수조건이다. 각 부분의 이해는 만일 그 핵심 메시지와의 관계가 식별될 수 있다면 중요성을 갖게된다. 때때로 핵심 메시지--"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리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등장하고 있고 또한 단락들의 순서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마19:30; 20:16).
(b)저자 동기
많은 핵심 구절들이 관련되어진 것으로 나타날 때, 독자는 저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한 주제를 찾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캐드버리(Cadbury)는 저자의 동기들을 깊이 찾고자 하였다.
만약 독자가 흔한 형태의 전문용어로 비평의 단계들을 구별한다면, "동기비평"이란 말을 새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게될지도 모른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동기인식이 형태인식만큼이나 충분히 중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구결과는 동기비평, 형태비평, 자료비평, 그리고 이들 비평들 후에, 역사비평이어야 한다.(주45)
캐드버리는 복음서 저술들에서 계속해서 혼합된 동기들을 지적하였고, 그것들과 역사적인 것들과의 관계를 평가하였다. 그는 슈미에델이 그의 핵심 구절들을 역사적인 것으로 선포했던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슈미에델은 이 구절들이 예수를 밝히 제시하려는 동기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구절들이 꾸며진 것들이라면 저자의 기록 동기에 어긋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자료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반영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드버리는 다양한 동기들이 항상 실재하였다는 것, 한 가지 동기가 자료의 사용을 신속히 하기 위해서 또 다른 동기를 뒤엎었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동기의 근거 위에서는 그것의 역사성에 관하여 아무런 결론도 내려질 수 없었다는 입장을 지켰다. 캐드버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누가 그들이 제시하는 동기들이, 주장되어져 왔던 것처럼, 그것들을 좀 더 역사에 충실하게 하거나 혹은 꾸밀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말하겠는가?(주46)
캐드버리는 역사성을 확신할 수 있는 동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동기가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자료를 의심스럽게 보려는 그의 경향을 매우 조심스러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만약에 동기가 충분하다면 그 이야기는 역사이기보다는 창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요소도 포함되어야 한다. 전체로서 얼마나 신뢰할만한 기록인가? 있을 법한 사실과 예상치 못한 사실들의 결합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신뢰할만한 개인이 동기를 갖고 그 진리를 기록하는 것이 둘 다 동시에 가능하지 않는가? 이것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캐드버리의 나중 결론이 중요한 곳에 있다. 진실을 기록하리라고 신뢰가 가는 개인은 그의 동기가 분명하든 그렇지 않든 진실을 기록할 수 있다. 동기가 최종적으로 역사성을 입증하는 결론이 될 수는 없지만, 동기가 있으면 구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c)의무 적용
핵심 메시지의 중요성은 오늘의 적용에 중요한 역할을 포함시킨다. 구절의 요약진리는 그것의 중요성 안에서 우리의 현재 상황에로 확장되고, 오늘 여기에 사는 개인의 삶 속에서 그 의미의 중심이 된다. 이것은 독자들의 이어지는 각 세대에로 그 자체가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일종의 다리이다.
Ⅲ. 예문
사실비평이 성경 해석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나사렛에서 예수께서 배척 당하신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 4장 14-30절의 기록을 예로 들어 설명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제시된 연구의 요점만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있을 법한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 발견되는가? 그렇다. (1)삶에 진실 되다.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있을 법한 사실이다. (2)관습에 진실 되다. 회당에 참석하는 것(회당예배, 설교요청, 성경봉독, 견해피력)은 있을 법한 사실이다.(주47) (3)기대들이 진실 되다. 자기 지방 출신의 젊은이를 칭찬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있을 법한 사실이다(4:22).
예상치 못한 사실이 구절에서 발견되는가? 그렇다. (1)처음에 그들은 예수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다가 나중에는 죽이려고 하였다. (2)사건의 배치가 예상치 못한 곳이다. 누가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한 첫 사역으로 배치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갈릴리 사역 중반에 배치하고 있다. 또 누가 자신은 이 사건의 발생이 예수께서 가버나움 사역에서 얻은 명성을 언급함으로서 이 사건이 나중에 나왔어야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4:23). (3)예수는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나사렛에서는 행치 않으셨다. (4)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5)예수는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이방인들로부터 선택된 경우들을 제시하였다.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 말씀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분명하게 "내가 메시아이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는 그 성구의 목적과 동기들에 관하여 물어야 한다. 분명하게 이 사건이 예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이 사건을 여기에 배치하였는가? (1)이사야 예언의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고 있었던 사역형태를 소개하려고. (2)예수의 이 메시아 주장을 일찌감치 독자에게 제시하려고. (3)예수께서 이 시기에 하고 있었던 (특별히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서) 회당설교의 보기를 제시하려고. (4)갈릴리에서의 인기가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이려고. (5)독자를 예루살렘에서 죽음에로 이끌고 가는 배척에 대비토록 하기 위해서. (6)예수께서 그의 설교에 이방인들을 포함시켰다는 것을 이방 세계에 보이려고. 연대는 중요치 않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독자가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데 사용되어진다. 환영이 나사렛에서 배척으로 반전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작은 벽감(壁龕)에 두려고 하였지만, 그런 과소평가를 용납지 않으셨다("선지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 24절). (2)기적을 행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기를 거절하였다(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23절). (3)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하였다("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 21절). (4)하나님께서 유대인들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을 즐겨 도왔던 경우들을 예로 들었다(25-27절).
핵심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예수께서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가 예수를 위해 준비한 작은 장소는 그분에게 맞지 않는다. 예수의 능력이 우리들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삭감된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는 섬기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민족보다 뛰어난 민족에게 보이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고루 보이신다. 예수는 예언의 성취이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셨다. 독자 각자는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단하도록 되어 있다. 그분은 사실이다. 그분의 메시지는 사실이다. 그 결단은 사실이다.
Ⅳ. 결론: 하나의 가능한 방향
1. 부정적인 비평
금세기에 일어난 학문적인 성경비평에 관한 신속한 조사는 관심을 끄는 연구가 성경의 의미이해와 기독교인의 믿음에 대한 이상에 훨씬 못 미치는 주제들에 주로 초점이 맞춰졌고, 출발점들을 사용하였으며, 방법들을 채택하였고, 목표들을 세웠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주48)
2. 또 다른 접근 방법
본 연구에서 우리는 성경 그 자체의 기록에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말이 있었는가를 전할 목적으로 기록된 이야기로 성경의 기록을 취급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본질적으로 사건이나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주49) 또 혹자가 의미 있다고 부르기 좋아하는 재구성과 사건을 바꿔버리는 인기 많은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적어도 그 기록 내용에 담긴 사실적 자료에로 얼굴을 돌릴 수 있다. 그 기록과 함께 하는 이 사실적 출발이 바로 모든 것을 위한 진정한 출발점이다.
3. 있을 법한 사실
이야기의 있을 법한 사실과 함께 시작하라. 그 이야기가 기록된 발생사건들의 때와 장소에 어떻게 잘 들어맞는지를 보라. 이것을 겉으로 들어내는 최우선의 목적이 변증적인 이유들 때문은 아니다. 일단 그것이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보게되면, 그 구절의 의미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적인 가치는 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오늘의 "삶에 진실한" 것을 찾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있을 법한 사실이 거기에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증거가 일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주50) 좀더 점검들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조각들이 우리의 무지 때문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실제로 모순되는가? 우리들은 일부 차이점들을 기대할 수 있는가?
4. 예상치 못한 사실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일부 차이점들은 기대된다. 어떤 "예상치 못한 것들"은 사실을 확증한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메시아 왕이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상치 못한 것들"을 연구하는 것은 새로운 왕국과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이성이 기대하지 않을 일들이 있으나, 그것들이 알려질 때, 그것들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 일들도 있으나 그렇다고 이 사실이 그것들을 비역사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이야기들을 예상치 못한 사실과 함께 있을 법한 사실로 기록하는 바로 그 방법은 그것이 그런 방식으로 발생하였으며, 저자들이 사실을 적는데 충실하였다는 확신을 강화시킨다.
5. 핵심 메시지
앞에서 밝힌 대로, 저자가 기록하면서 가졌던 전체적인 목적, 저자가 이야기 속에 포함시킨 자료들의 각 단락들을 선별하면서 가졌던 동기, 자기의 복음을 펼쳐 보이는 순서, 특별한 구절에서 끄집어내기를 원했던 중심 진리에 대한 깊이 있는 파악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꿰매는 실은 각각의 이야기들, 즉 설교이든 기적이든, 사건이든 말씀이든 간에 그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되는 핵심 메시지들이다.
6. 믿음의 요소
만약 Realgeschichte를 번역해야 한다면, "사실비평"(factual criticism)으로 하면 될 것이다. Geschichte가 "비평"(criticism)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Formgeschichte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Geschichte란 말은 어떤 주장도 순수역사(Realhistorie)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 독자가 칸트(Kant)의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은, 폰 랑케(von Ranke)의 "어떻게 그것이 실재로 존재하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해석에 관한 것이지 궁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real)은 여전히 비평(Geschichte)과 결합되어 그 말이 사실적인 것들을 가리키게 한다. 이것은 신화, 설화, 전설의 틀 속에서 해설을 결합하는 것과 아주 다르며, 또는 저자들 대신에 편집자들을 강조하는 것과도 아주 다르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전제들을 반영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는 입장(direction) 속에 넣어둔 그들 이용도구들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 동일한 도구들은 신자들의 캠프들에서 그러나 성경의 진리들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부담 없이도 사용되어질 수 있다.(주51) 다양한 접근방법에서 수집한 정보는 이용될 수 있다. 삶의 정황(Sitz im Leben)는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형태는 문학적이든 설화적이든 모두 연구되어져야 한다. 저자의 동기들과 계획은 사실비평에서 본질적인 위치들을 점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은 솔질한 믿음으로 접근되어지고, 전승의 제3 혹은 제4 층보다는 본래의 발생과 말씀에 더 가까운 목표들에 조준되어진다. 이것은 덜 객관적일 필요가 없으나 의심을 품고 하는 접근보다는 더 객관적이 되도록 노력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하나님 당신을 한 역사적인 인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과거 한 차례 지상에 살기 위해서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사실은 믿음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 사건들은 실재적이었고, 그 기록들은 사실적이며, 그 진리들은 부인할 수 없다.
각주
*Lewis Foster박사는 Cincinnati Bible Seminary의 신약학 교수로 1987년에 은퇴하였다. Foster박사는 BA, MA, MDiv를 CBS에서 받고, BS를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받았으며, 다시 MDiv를 예일대학교에서 받고, STM과 PhD를 하바드 대학교에서 받았다.
주1. P. W. Schmiedel, "Gospels," in Encyclopedia Biblica(London: A. & C. Black, 1901); R. Bultmann,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New York: Harper, 1963); W. Marxse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Philadelphia: Fortress, 1964).
주2. F. C. Burkitt, The Gospel History and Its Transmission(Edinburgh: T. & T. Clark, 1911); H. J. Cadbury, "Mixed Motives in the Gospels,"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95/2(1951) 117-124; W. G. K mmel, The New Testament: The History of the Investigation of Its Problems(Nashville: Abingdon, 1972).
주3. S. Zeitlin, "The Halaka in the Gospels and Its Relation to the Jewish Law at the Time of Jesus," HUCA 1(1924) 357-373; S. Sandmel, The First Christian Century in Judaism and Christianity(New York: Oxford University, 1969.
주4. B.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Grand Rapids: Baker, 1970); A. Berkeley Mickelsen, Interpreting the Bible(Grand Rapids: Eerdmans, 1963); I. H. Marshall, ed., New Testament Interpretation(Grand Rapids: Eerdmans, 1977).
주5. J. L. Neve,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Philadelphia: Muhlenberg, 1946), 2. 156ff.
주6. A. D. Nock, "Early Gentile Christianity and Its Hellenistic Background," in Essays on Religion and The Ancient World, vol. 1(Cambridge: Harvard, 1924, 1972).
주7. Ibid., p. 119.
주8. Ibid., p. 131.
주9. B. H. Streeter, The Four Gospels: A Study of Origins(London: Macmillan, 1924); W. A. Beardslee, Literary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Philadelphia: Fortress, 1970); E. de W. Burton, Som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 and Their Application to the Synoptic Problem(Chicago: University Press, 1904); B. C. Butler, The Originality of St. Matthew(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 W. R. Farmer, The Synoptic Problem(London: Collier-Macmillan, 1964); E. P. Sanders, The Tendencies of the Synoptic Tradi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주10. A. Harnack, The Sayings of Jesus(New York: Putnam's, 1908).
주11. L. A. Foster, "The Q Myth in Synoptic Studies," JETS(Fall 1964) 111-119.
주12. A. Schweitzer,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New York: Macmillan, 1948).
주13. L. A. Foster, "Bases for the Historical Jesus," JETS6(1963).
주14. M. Debelius, From Tradition to Gospel(New York: Scribner's, 1934).
주15. Bultmann, History; see also W. G. Doty, "The Discipline and Literature of New Testament Form Criticism," ATR51(1969) 257-319; E. V. McKnight, What Is Form Criticism?(Philadelphia: Fortress, 1969).
주16. Cf. G. H. Clark, Historiography: Secular and Religious(Nutley: Craig, 1971) 177-178; cf. pp. 368-371.
주17. N. Perrin, What Is Redaction Criticism?(London: SPCK, 1970).
주18. W. Marxen, Der Evangelist Markus. Studien zur Redakitionsgeschichte des Evangeliums(G 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56, 1959) = Mark the Evangelist(New York: Abingdon, 1969); J. Rhode, Rediscovering the Teaching of the Evangelists(Philadelphia: Westminster, 1969).
주19. D. O. Via, Jr., "A Structuralist Approach to Paul's Old Testament Hermeneutic," Int28(1974) 201-220. "구조는, 적절하게 말하자면, 본문에서 다소 볼 수 있고 혹은 분명한 패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숨겨진 혹은 밑에 있는 외형이다"(p. 202). "성경해석의 목적으로 구조주의를 채택하고 또 채택하는 한 가지 필연적 결과는, 오래도록 대우받고 있는 역사적 접근방법이 원리에서 거부되지 않고 있고, 한 가지 적법하고 제한된 관점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는 한,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이고, 개개의 역사적 고려들은 동시발생적일 뿐이다는 것이다"(p. 201).
주20. See n. 29 below.
주21. A. M. Johnson, ed., The New Testament and Structuralism(Pittsburgh: Pickwick, 1976); A. M. Johnson, ed., Structuralism and Biblical Hermeneutics(Pittsburgh: Pickwick, 1979); A. M. Johnson, A Bibliography of Semiological and Structural Studies of Religion(Pittsburgh: Clifford E. Barbour Library, 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
주22. A. C. Thiselton, "Semantics and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in New Testament Interpretation(ed. Marshall) 75-104.
주23. A.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 The Language of the Gospel(London/New York: SCM/Harper, 1964); G. A. Kenned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1984).
주24. G. Ebeling, The Nature of Faith(Philadelphia: Muhlenberg, 1961) 187.
주25. P. Henry, New Directions in New Testament Study(Philadelphia: Westminster, 1979) 120-152.
주26. E. Fuchs, Studies of the Historical Jesus(London: SCM, 1964).
주27. A. C. Thiselton, "The New Hermeneutics," in New Testament Interpretation(ed, Marshall) 308-333.
주28. G. Ebeling, Theology and Proclamation(London: SCM, 1963) 38.
주29. B. F. Westcott and F. J. A. Hort,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Introduction and Appendix(New York: Harper, 1882); W. N. Pickering, The Identity of the New Testament Text(Nashville: Nelson, 1977); H. A. Sturz, The Byzantine Text-Type: New Testament Textual Criticism(Nashville: Nelson 1984); B. M.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Oxford: University Press, 1968).
주30. Cf. P. B. Payne, "The Fallacy of Equating Meaning with the Human Author's Intention," JETS 20(1977) 243-252.
주31. 불트만의 Fragestellung(Formulation of a question)은 일종의 일반 소개이다. 질문이 물어지는 방법은 종종 어떻게 그것이 대답되어지질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R. Bultmann, Existence and Faith(New York: Meridian, 1960) 346.
주32. R. C. Fos
Realgeshichte: Old and New in Interpretation(Dr. Lewis Foster)
http://kccs.pe.kr/thesis056.htm
글 : *Dr. Lewis Foster
번역 : 조동호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이해하려면 해석의 길(路)을 따라 가야한다. 그런데 이 여행에서 수많은 루트, 다양한 출발지점 그리고 도착지점들은 여행자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본 연구의 목적은 금세기에 소개된 다양한 해석학파들의 주장을 살펴보고, 우리 세대에 필요한 (1)기록된 성경의 의미파악과 (2)그 말씀의 신뢰성에 대한 확신의 강화, 그리고 (3)그 말씀의 진리전달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서 또 하나의 해석의 길(路)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해석의 길(路)이 놓여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길을 놓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재고의 가치가 없다는 반대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금세기 학자들의 성경연구논문들에 부정적인 비평이 너무 지배적이었다는 것, 그래서 진보신학자들은 물론이고 보수신학자들의 관심조차도 논쟁의 소지가 많은 주변분야들에 집중되었다는 것, 그리고 성경가르침의 중심이 강조되기보다는 오히려 외곽으로 밀려났다는 점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예수의 말씀들이 초대교회의 신앙(창작)으로 간주되었고, 문학장르에 대한 관심이 성경말씀의 내용에 대한 의지(excitement)를 꺾었으며, 형식과 구조의 강조는 그림의 모습(setting)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틀이 그림의 모습을 덮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작금의 이런 딜레마를 극복해 보려고 시도한 본 연구에서의 제안은 있는 그대로의 출발이자 개요에 불과하고, 충분하게 다룬 것은 전혀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 제안은 하나의 해석의 길을 놓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하나의 방향지시를 하려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제안들이 확고한 형태로 제시된 유일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 방향에 동의할 것이란 기대와 지금 마음에 그린 설계보다 훨씬 더 좋은 길들을 놓게 될 것이란 희망에서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신약성경해석에의 20세기 접근방법들이 만들어 놓은 도로망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강조점이 바뀌는 곳을 볼 수도 있고, 상이한 진로들과 추구되는 목표들을 추적할 수도 있으며, 또 본 연구의 제안에서도 다시 등장하게 될 다양한 지점들을 관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자신의 출발지점을 떠나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서 여행을 시작하게되면, 어떤 지점이나 혹은 또 다른 지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들의 길들, 이를테면, 슈미에델(Schmiedel), 불트만(Bultmann), 마르크센(Marxsen)과 같은 급진주의 학자들(주1), 혹은 벌키트(Burkitt), 캐드버리(Cadbury), 쿰멜(Kümmel)과 같은 진보주의 해석가들(주2), 제이트린(Zeitlin)과 산드멜(Sandmel)과 같은 유대주의 권위자들(주3)은 물론이고, 램(Ramm), 미켈센(Mickelsen), 마솰(Marshall)과 같은 보수주의 대표자들(주4)이 놓은 길들과도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기존의 해석학들의 방향을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에 본 연구에서 시도하려는 새로운 해석학의 원리들과 방법론이 설명될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 이 방법이 어떻게 성경해석에 적용되어질 수 있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본 연구에는 새롭게 주장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모든 방법이 이전에 이미 다 나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별과 강조들만은 다르다. 그 목적은 그 선별과 강조들 가운데서 사건과 성경말씀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한 방법, 즉 독자의 삶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적용되어질 수 있고, 독자가 택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해석이론들의 미궁사이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다리로서 혹은 그것들을 통과하는 길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는 하나의 접근방법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Ⅰ. 성경해석에의 20세기 접근방법들
1. 비교종교비평(Religionsgeschichte)
세기가 바뀌면서 여러 세계종교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나타났다. 성경분야에서 특별히 기독교가 시작된 시기와 장소에 근접한 종교들이 기독교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연구되어졌다.(주5) 유사성이 발견되면 즉시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가 그것들을 타종교에서 빌려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밝히고 있는 특별계시를 부정하는데 이용되었다. 점점 더 많은 이론들이 기독교신앙들을 단순히 헬라세계의 산물로 설명할 목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종교의 권위자인 노크(A. D. Nock)가 짧지만 매우 중요한 연구서를 출판하면서 반환점에 접어들게 되었다.(주6) 진보주의 학계가 종교학역사 분야에 종사하는 그들의 동료로부터 그들의 이론들을 확정짓는 결과를 기대했던 바로 그 때에 노크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들을 선포하였다. 실제로 노크는 그의 연구에서 유사점들을 발견은 했지만, 그것들은 아주 중요한 분야들에서는 빌려왔다는 점을 수용할 수 없는 그런 성격의 것들이었던 것이다. 노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 신앙(cultus)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독교가 주변의 종교와 많은 부분 공통점을 갖고는 있었지만, 기독교발전에서 보여지는 원동력들(driving forces)은 대부분 자체 내에서 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발전은 진공상태(in vacuo)에서 이루진 것이 아니라, 헬라세계의 배경에서 이루어졌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연구하여 얻은 증거는 기독교가 상당부분 빌려왔다는 가설을 정당화시키지 않는 것 같다. 만일에 그 증거가 그와 같은 주장을 정당화시킨다해도, 새로운 믿음의 발전은 여전히 개인적일 뿐 아니라 자각적으로 개인적인 어떤 것의 발전이었을 것이다.(주7)
왜 기독교가 종교들의 갈등에서 성공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에서 노크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기독교는 일종의 신앙(cultus)을 제시하였다. 그 신앙 안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와 형제애의 욕망이 채워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수단을 깨닫게 하는 유익을 나누었다. 구세주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에게는 아주 공격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방어할 필요가 있었던 전설들로 꽉 채워진 신화적 인물이 아닌, 신성이 부여된 최근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뛰어났다.(주8)
환원하면, 노크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쓴 수많은 옛 기록들을 함께 연구함으로서 역사적으로 참인 예수가 처음부터 기독교를 이해하는 중심이며,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타종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님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2. 자료비평(Quellengeschichte)
학계의 관심은 바꿨다. 만일 자기 자신이 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역으로 여행을 하고있다고 상상한다면, 20세기의 평범한 학자(Mr. Average Scholar)의 루트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승차하는 노선지도를 읽는 지점(Reader's Point)에서 지하철을 탔고, 만국역(All-Nations' Station)에서 내려 그곳에서 오랜 기간 비교종교비평(Religionsgeschichte)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타고 노선을 따라 진행해 보기로 했고, 그도 열차를 탔다. 도중에 그들은 본문역(Text Station)을 지나쳤다. 거기에서는 거의 몇 사람 내리지 않았다.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가 그 지역을 매우 철저하게 다루었고, 다른 사람이 그곳에서 보탤 것을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역도 역시 지나쳤다. 그 곳에서는 성경의 저자들을 다루어야했다. 그 역에서 승차한 몇몇 사람이 일부 저자들을 부인하였지만, 사람들은 다음 역의 간판들, 즉 일부 성경에 사용된 자료들에 더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이 연구에 자료비평(Quellengeschichte)이란 이름이 붙여졌다.(주9)
여기서 자료비평 학자들은 주로 공관복음서의 유사성을 연구하였다. 사중복음서가 버림을 받았고, 두 자료설 즉 초기 마가와 "Q"(Quelle, 자료)로 이름 붙여진 가설문서가 부각되었다. Q자료는 마가복음에는 없고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모두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유사한 자료를 언급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차이점들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한 저자가 또 다른 저자로부터 복사했다고 볼 수가 없는가 하면, 다른 한편 유사성이 너무 커서 그들이 피차 독립적이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주지하는바 대로,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Q자료가설이 만들어진 것이다.(주10)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는바 대로, 만일에 이것이 금세기 신약성경학계가 생산한 가장 확실한 결론이라면, 이것은 한 세기의 업적에 관한 하나의 슬픈 해설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주11)
자료설이 주장되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주12) 결과적으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희망을 버렸고, 그 자리를 초기교회의 신앙(창작)들에 근거해서 만든 문학적인 재구성으로 채웠다.(주13) 결국 그들은 예수가 그들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갔음을 깨달았을 때, 역사적 예수는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로 남아있는 한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선언하였다.
3. 양식비평(Formgeschichte)
만일 학자들이 지하철 노선이 시작되는 곳을 향해 전승역(Tradition Station)에까지 더 나아간다면, 무엇인가 더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이것은 정경인 복음서 배후에 있는 문서자료들보다도 더 오래된 복음서의 상태일 것이다. 세계 제1차 대전의 포성이 멎은 후, 디벨리우스(Debelius)는 해석자들의 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새로운 접근방법에 발을 들여놓았다.(주14) 만일에 복음서 이야기들 가운데 낱개의 블록들에서 전승자료의 양식을 구별해 낼 수 있다면, 그 이야기가 "설화"(tales) 바구니에 들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전설"(legends)이나 "신화적 해석"(mythological interpretation) 바구니에 들어가야 하는지, 혹은 그 밖의 다른 식별 가능한 양식 바구니들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불트만(Bultmann)은 자신의 바구니들을 디벨리우스와는 다르게 이름 붙였으나 양식비평(Formgeschichte)에 대한 동일한 방법론을 주창하였다.(주15)
4. 편집비평(Redaktionsgeschichte)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또 하나의 부름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자는 전승역이 시발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고, 전승역에서 내려 찾고자했던 전승연구도 마쳤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이 시발역으로 가서 실제로 무엇이 그곳에서 말씀되어지고 행하여졌는가, 즉 신약성경이 말하고있는 실제로 산 사람들과 실제로 일어난 정황에의 구심점에로 옮겨 갈 것으로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은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갔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신앙보다 더 깊이 꿰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시발역에서 실제로 무엇이 말씀되어지고 행하여졌는가를 결정할 수 없다고 들었다고 했다.(주16) 그래서 그들은 열차에 올라타 시발역과는 반대 방향, 즉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향하였다.
이번에 그들은 몇 년 전에 그대로 지나쳤던 저자역(Author Station)에서 멈췄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복음서의 저자들을 저자들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료역과 전승역에서 모은 지식으로 인해서 복음서의 기록자들을 저자들이 아닌 편집자들이라 하였고,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마지막 손질한"(the finishing touches) 손 또는 손들이라고 하였다.(주17) 그들은 지난번 거쳐온 자료역에서 공관복음서의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유사성을 강조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차이점들이 빛을 보게되었고, 이 개개의 차이점 속에 편집자의 독특한 신학이 담겨있을 암시가 발견된다고 했다.(주18) 각 권의 공관복음서들에서 이들 차이점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저자들은 편집자들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5. 구조분석(Structural Analysis)
일부는 편집비평역(Redaktionsgeschichte)을 떠나 소홀히 취급했던 본문역(Text Station)으로 여행하였다. 이들은 주된 연구로 헬라어 본문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기록문서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평행구조들을 찾기 원했고, 특별히 고안한 방법으로 유사점들을 찾고자 했다.(주19) 그리고 이들 구절들이 조합이 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으로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연구는 헬라어 사본을 읽거나 헬라어 본문을 결정하는 작업들과 비교해서 본문 그 자체의 연구로 불려질 수 없다.(주20) 구조분석가들의 접근방법은 전동차와 고압선으로 연결되는 스푸르선(spur line)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구조분석은 제안된 의미를 식별해내기 위해서 자체의 전문 용어들을 필요로 하는 매우 어려운 학술용어들과 과정들을 발전시켰다.(주21)
6. 의미론(Semantics)
몇 개의 스푸르선(spur lines)들이 본문과 관련해서 급히 놓여졌다. 한 가지 접근방법은 "의미"(meaning), 즉 단어들의 단순한 기본의미가 아닌 어근의미를 다루어야 한다. 구절의 문맥적 의미는 낱개 단어의 발전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이 발견된다.(주22)
7. 수사학(Rhetoric)
또 하나의 두드러진 접근방법은 고전 수사학아래에 있는 이론적 개념들의 연구와 함께 시작되고, 수사학비평의 적용을 위해 다른 범주들을 계속해서 식별한다. 수사학적 단위를 정하고 나면 그 단위가 갖고 있는 수사학적 상황을 정하고, 다음에는 수사학적 문제, 마지막으로 자료의 배열을 정한다.(주23) 혹자가 신약성경의 수사학에서 발견되는 가능한 설계를 잘 알게되는 반면, 진리들을 받아드리는 힘은 빨리 커지지 않는다.
8. 워드 파워(Word Power)
에벨링(Ebeling)은 어휘들의 또 다른 면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어휘들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묻는다고 그것들의 본질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무슨 영향을 주는가, 그것들이 무엇을 지속시키고 있는가를 물음으로서 그 어휘들의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주24) 그러나 이 말속에 나타난 관심은 신약성경의 본문을 보는 것이고,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독자의 기원 속에서 진실로 드러나는 것이 그를 위한 진리가 된다. 이런 형태의 접근방법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만드는 노력을 통해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주25) 실제로 좌절감은 역사가 해석에 제한될 때에 일어난다. 해석학의 이런 형태 속에서 한 구절이 말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방법, 즉 그 구절이 개인을 선발하고 움켜잡도록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본문은 살아있어야 한다."(주26)
티셀톤(Thiselton)은 여기서 위험성을 지적한다. 성경의 어떤 진리들은 강조하고 나머지는 완전히 생략해버리기 때문에 너무 주관적이고 너무 선별적이라는 것이다.(주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신약성경을 덜 사실적이 되게 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적어도 현재는 그것을 더욱 사실적이 되게 하는 움직임이다.
에벨링은 "케뤼그마는 . . . 인간 실존에 관한 설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일어났던 것에 대한 증거이다."(주28)고 주장하였다. 이 접근방법은 어휘들 자체와의 근접한 관계를 요구한다.
9. 본문(The Text)
한편 중요한 본문역(Text Station)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져 왔다.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의 업적이 도전을 받고 있다. 신약성경 사본들의 대다수가 중세기에 필사되었고, 일반적으로 더 초기 시대에 발견되는 다양한 본문 형태와는 다른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본문 형태로 분류되어진다. 왜 초기 사본들은 다양한 반면, 후기 사본들은 더욱 통일성을 보이는가? 만약에 중세사본의 통일성과 다수보존이 원본에 가깝기 때문이라면, 본문 형태들이 그렇게 다양했던 초기 시대에는 그것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것은 원본기록형태에 가급적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참된 본문연구이다.(주29)
10. 신해석학(The New Hermeneutics)
실존주의자들은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다. "이 구절이 지금 여기서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적용에 유익한 목표이다. 그러나 이 접근방법은 너무 자주 하나의 지름길로 사용되어진다. 첫 번째 중요한 질문을 무시할 수 없다. "영감 받은 저자가 본래 의도했던 의미는 무엇인가?"(주30)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우리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적용할 준비가 완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철노선을 따라 오고가며 이루어진 이들 모든 여행들에서 무시되었던 한 역에로의 여행을 요구한다. 첫째, 시발역이 연구의 공식초점에서 회피되었다. 성경을 믿는 개인들은 성경 본문의 말씀들과 진리들을 항상 신뢰하여 왔다. 그들은 이 역을 거리낌없는 방법 속에서 다년간 이용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홈베이스를 절대 떠나지 않는 자들로 비판을 받아왔다.
이전 세대들이 사용했던 오랜 해석방법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여행자는 노선을 따라 모든 역을 여행할 수 있고 또 여전히 시발역을 이용할 수 있는가? 여행자는 홈베이스를 떠나 멀리 여행한 후에 이 시발역에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그 메시지를 노선 다른 끝에 있는 독자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본 연구가 제안코자 하는 사실비평(Realgeshichte)의 역할이다. 시발역에서 사실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그 메시지를 노선지도를 읽는 지점(Reader's Point)에로 가져가는 역할이다.
Ⅱ. 사실비평(Realgeshichte)
1. 용어
'사실비평'이란 이름을 택하게된 동기를 밝히고자 한다. 어떤 이는 "독일어 이름을 붙인 이유는 그 이름이 다른 독일어 비평용어들처럼 들리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영어에는 성경해석이 안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매우 적절히 함축하고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비평(Realgeshichte)이란 용어가 갖고있는 뉘앙스들을 검토해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또 어떤 이는 "이 단어를 이름에 붙인 이유는 성경의 무류성(infallibility)와 무오성(inerrancy)을 믿고 있고, 선험적으로 성경이 모두 사실이고 참이다 고 믿기 때문이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을 무류하고 무오하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확신하지만, 증거나 생각도 없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단순히 그렇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은 성경의 주장들과 도처에서 확인된 증거를 수용한다. 그렇다. "사실"(real)이란 말은, "신화"(myth)와 "편집자"(redactor)란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연상시키듯이,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본인은 긍정적인 접근방법과 이 점과 관련해서 본인의 입장을 지시하는 용어를 선호한다. 하지만, 증거에 대한 검토를 배제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용어 선택의 이유는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사실비평이 참된 해석의 최종적인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선택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이것도 아니다. 사실비평은 확립된 해석방법 또는 최종적으로 완성된 접근방법이 아니다. 사실비평은 의도된 것을 분명하게 할 수 있도록 한 앞서의 몇 가지 제안들과 관련해서 붙여진 호칭일 뿐이다.
이 이름을 고른 이유는 "사실"(real)이 들어가 조성되는 몇 개의 합성어가 갖는 적적한 의미들과도 연관이 있다.
(1)사실백과사전(Realenzyklopädie)
이것은 포괄적이고 철저하고 전체적인 백과사전을 표시하는 복합어이다. 사전이나 백과사전이 도움은 되지만, 사실백과사전(Realenzyklop?ie)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상세하게 취급하는 방법으로 모든 주제를 다루도록 편찬된 것이다. 해석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문맥, 즉 구절의 문맥뿐 아니라 전체 서신 혹은 전체 복음서의 문맥, 또 책의 문맥뿐 아니라 전체 신약성경 또는 전체 신구약성경의 문맥과의 합의이다. 아직도 글에 있어서 더 넓은 때와 장소의 문맥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주석은 역사와 철학, 사회학과 심리학과 같은 다른 인접학문의 훈련을 요구한다. 진리는 어떤 분야에서 그것이 발견되든지 간에 진리를 해방한다. 사실비평의 목표들은 한 구절의 이해에 필요한 충만하고 포괄적인 접근방법을 포함한다.
(2)사실정책(Realpolitik)
"사실"과 "정책"의 복합은 일부 좋은 면과 나쁜 면에서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정황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조정테이블에서 사용되어진 용어이지만, 불행히도 폭력과 관련되어져 있다. 다른 한편, 그것은 현실적으로 문제를 보는 것과 관련이 있지 이슈의 모든 면을 고려하지도 않고 협약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심을 알아주기 바라는 것과 관련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자를 위해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여기에 포함된다. 해석자는, 그것들이 문학적 형식이든, 신학적 함축들이든, 역사적 재구성들이든, 혹은 철학적 전제들이든지 간에,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성경의 어록이나 정황을 취해야지, 이론에 맞추려고 그것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연구는 기록될 때 의도됐던 그대로 구절을 취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져야한다. 이것이 사실비평이다.
(3)사실지식(Realerkenntnis)
독일어 Erkenntnis는 "지식" 또는 "이해"를 뜻한다. 사실(real)이란 말과 합하여져서 그것은 가상적인 것들과는 반대로 실제적인 것들의 사실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지난 50년 간 해석학에서 삶의 정황(Sitz im Leben), 즉 당대의 참 삶의 배경과 성경이 기록된 장소의 중요성이 종종 어필되었다. 성경이 기록된 참 삶의 정황에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자주 우리 자신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서 비롯된 철학들과 형식들이 성경본문 위에 첨가되었고, 소위 중요하다는 바로 그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무효화시켰다. 사실비평은 성경의 기록을 실제로 발생된 신뢰할만한 이야기로, 원저자의 의도대로 다루고자 한다. 사실비평은 시도 때도 없이 문자적 해석을 본문에 적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원저자가 문자적으로 썼으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비유적으로 썼으면 비유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사실비평은 저자가 의도한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그가 의도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불확실하게 나타나는 영역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주제넘게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4)사실가치(Realwert)
사실(real)의 또 하나의 중요성이 부동산의 영역에서 보여진다. 금전의 가격은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에 따라 오르고 내린다. 그러나 부동산에 있어서는 소유지의 사실가치(Realwert) 즉 실제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가격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성경해석에 도움이 되는 적용은 평이하다. 성경의 각 부분들에 비교 사실가치를 표시할 것이 아니라, 성구의 의도된 강조와 오늘 우리의 삶에 가장 좋게 적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도록 힘쓰면서 성경을 연구해야한다. 그 가르침의 사실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사실비평의 이 단면은 성경에서 발견된 강조들을 결정하고 이들 강조들을 지키려는 시도를 말한다. 그것을 함께 모으는 작업의 밑바닥에 놓인 모티브들을 찾는 것은 사실가치(Realwert)의 일부분이다. 차례로 책의 순환 주제들과 개개의 성구들과의 관계는 그 부분들의 진가를 끌어올린다. 표면아래 있는 이들 흐름을 발견하는 것은 그것의 역사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의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2. 방법론(The Methodology)
이 용어 사실비평(Realgeshichte)은 해석의 출발점, 목표, 혹은 방법론을 암시하는가? 진실로 이 세 가지 모두가 사실(real)의 개념과 조화를 이룬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이 실제로 말하여지고 행하여졌는가에 있다. 저자들의 기록과 계획과 목적의 실제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의 삶과 개입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의 중요성 또한 사실이 되어야한다. 사실비평은 사건발생에서 실제적인 것, 기록에서 사실적인 것, 그리고 적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을 찾는다.
우리가 제안하는 이것을 행하는 방법은 본문에 대해서 질문들을 묻고(주31), 우리가 의미를 이해하고, 신뢰성여부를 알아보고, 적용하는데 도움을 줄 범례들로 그 결과들을 나누는 보편적인 절차를 따르는 것이다. 양식비평(Formgeschichte)이 자료를 설화, 전설, 신화 등의 이름을 붙인 각각의 바구니들로 나눈 것처럼,(주32) 우리도 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 예상치 못한 사실(the unexpected), 핵심 메시지(the key message)로 이름을 붙인 바구니들로 구분할 것이다.
이들 범례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한 가지 간략한 예를 들어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질 것인가를 설명하고, 좀더 분명한 정의를 내릴 것이다. 예수께서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야기가 있다(눅 2:41-5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설명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때와 장소에 아주 잘 들어맞기 때문에 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이 풍부하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족여행(주33), 유월절 준수, 열두 살 말엽에 맞는 유대소년의 삶의 이정표,(주34) 율법학자들과 그들의 성전에서의 가르침, 요셉과 마리아의 관심, 이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 배경을 제공하고, 당대에 경험들을 반영하는 참된 이야기라는 확신을 준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로부터 예수의 떨어짐, 부모들이 그를 찾는데 걸린 긴 기간, 그들이 그를 떼 놓았던 장소와 때, 마리아의 꾸중과 예수의 대답과 같은 예상치 못한(the unexpected) 요소들도 있다. 예상치 못한 목록들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의심나게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사실의 특성이 현실감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강하게 한다.
그리고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어떤 이는 조숙한 아이로서 후에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를 예시하는 예수의 사진을 가리킬는지 모른다. 다른 이들은 에피소드의 뒷부분 2장 51절에 기술된 대로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예수의 됨됨이를 강조할는지 모른다. 이런 지적들이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지 몰라도, 그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아니다. 사실가치(Realwert)는 마리아의 꾸중에 대한 예수 자신의 답변에서 나타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누가는 독자들이 예수께서 이렇게 일찍 어린 때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그의 답변에서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할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사적인 의무와 인간의 권위에 자유롭게 답할 수 있는 궁극적인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누가의 기술이 성전의 장면에서 어떻게 한정되어있는가를 주목하라. 누가는 예수께서 율법교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거나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가는 단순히 예수께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였는데, 그곳에 있었던 자들이 그의 대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무언가 사실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있고, 그것의 진실들은 독자들에게 믿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누가는 1장 4절에서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다."고 썼다. 가족의 예를 보라. 하나님의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을 보라. 아들이 돌아가 의무감을 가지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라.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
사실비평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1)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을 찾아라
있을 법한 사실(verisimilitude)은 사실적이고 진실한 것으로 드러난 무엇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만일 "사실"대신에 "들어남"을 강조하게되면 잘못될 수 있다. 사실비평에서 이 용어사용은 성경의 말씀들과 사건들이 기록된 때와 장소에 얼마나 잘 조화되는가를 뜻하는 것이다. 기술내용이 당시의 배경에 조화가 되면,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는 믿을만한 게 된다. 예수는 복음서 이야기에서 로마의 정치인이나 아테네의 철학자처럼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지상생활을 했던 때와 장소의 정황(context)을 반영한다.
벌키트(F. C. Burkitt)는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있을 법한 사실을 강조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예수와 헬라의 철학사상을 결합한 옥시린쿠스(Oxyrhynchus) "예수의 어록"에 대조시킨다.(주35) 비록 벌키트가 성경의 무류성(infallibility)을 수용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공관복음서를 일어났고 말씀되어진 것들을 기록한 역사적 이야기들로 본다. 벌키트는 슈미에델(Schmiedel)이 마가복음 4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복합자료설들을 억측하는 곳에서 그의 회의론을 혹평한다.(주36) 그는 "나는 모자이크 작업(슈미에델의 이론들)으로 이루어진 이들 정교한 노력들에서 있을 법한 사실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을 시인한다."(주37)고 결론지었다.
기독교 연구로 명성을 얻었던 유대주의 학자 산드멜(Sandmel)은 복음서의 있을 법한 사실에 관해서 비슷한 결론들에 도달하였다. 복음서 이야기들이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높고 총체적인 신뢰성" 때문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한 내용의 때와 장소에 저자(마가)가 있었음이 틀림없다.(주38)
캐드버리(Cadbury)는 젊음을 방대하고 학술적인 {초기 기독교}(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Foakes-Jackson and Lake) 집필에 보낸 후에, 늙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유대인들, 로마인들, 헬라인들,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들의 물질과의 관계에서 얻어낸 정보를 자세하게 적지 않고 간략하게 요약한 작은 부피의 책을 한 권 출판하였다.(주39) 머리말에서 그는 그가 발견한 것들에서 변증자료를 제공하려는 어떤 동기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대단한 진보신학자이다. 그러나 그가 평생토록 사도행전연구를 마친 후에 발견한 것들은 그로 하여금 기록된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현실성을 발견하게 하는 있을 법한 사실과 자세함을 강조하게 하였다.
한 구절에서 있을 법한 사실을 세우는 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도움을 준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예수를 그의 사실적 배경에서 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복음서 이야기의 저자들이 후기 자료들을 첨가하거나 예수의 입에 그의 말이 아닌 말씀을 담았거나 후기의 관심들을 집어넣지 않았다는 확신을 오늘의 독자에게 준다. 그렇지 않으면, 있을 법한 사실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있을 법한 사실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의 신뢰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더 넓은 의미에서 있을 법한 사실은 이들 복음서 진리들을 오늘의 "삶에 참되게" 적용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2)예상치 못한 사실에 주목하라
모든 주제문제가 있을 법한 사실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가? 독자는 당대의 사상과 문화의 특징에 반대되는 자료를 발견하는가? 참으로 그렇다. 복음서 이야기들은 때와 장소의 자연스런 흐름에 반대되는 예상치 못한 사실들로 가득하다. 과거에 "진실로"--요한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주40)로 번역된 예수께서 사용하신 도입감탄사에 관한 연구는 흥미롭다. 사실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주의력을 집중시키고자 하실 때에 진술을 끌어들인다. 또 특별한 권위를 주장하시기 위해서 그 말들을 사용하신다. 사실이다. 이어지는 문제는 변함 없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사용된 "진실로"로 시작된 모든 구절들에 공통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이어지는 주장은 대중적인 생각과 반대로 흐른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사실을 단언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종종 시대 흐름에 거슬린다.
상기한 내용을 언급한 기사에서 슈미에델(Schmiedel)은 예수의 생애에서 하나의 말씀에서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는 진술과 한 가지 행동(사건)에서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는 진술의 역사성을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위 슈미에델의 핵심구절로 알려진 몇몇 구절은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주41) 아이러니컬하게도 슈미에델이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인 그 진술들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구절들이 예상치 못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진술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이들 각각의 진술들은 예수의 인성에 이롭지 못한 것들이거나 예수의 인성을 제한하는 것들이었다. 그 진술들은 예수를 신성(영웅)시 하지 않았던 것들이기 때문에, 그 진술들이 꾸며진 것들일 리가 없다. 그 구절들은, 예를 들면, 인자는 그가 돌아올 날과 시간을 모른다(막 13:32). 예수의 친척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막 3:21). 예수는 나사렛에서 권능을 행할 수 없었다(막 6:5)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즉 단지 예상치 못한 것, 찬사가 없는 것, 꾸며낼 이유가 없는 것만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드린다는 점에서 거의 회의적이다. 그러나 독자가 예상치 못한 사실을 찾고, 또 그것의 역사성을 존중하는 이 해석방법에서 출발했다면, 왜 예수에게 이롭지 못한 예상치 못한 사실에 그것을 제한하는가? 왜 다른 예상치 못한 사실들에는 마찬가지로 제한하지 않는가? 만약 그 진술들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이었다면, 그것들은 꾸며지지 않았을 것이고 첨가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실을 어울리지 않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거기에 싣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최상의 또는 유일한 설명일는지 모른다. 즉 예상치 못한 사실이 그런 식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실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direction)을 고집하는 것은 있을 법한 사실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던져버리는 것이 될는지 모른다. 어떻게 독자가 있을 법한 사실에 또 그 이야기가 신뢰할만하다는 증거를 여기에서 찾는 것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서 동시에 예상치 못한 사실에 또 사실이 그 기록에 녹아있다는 지시를 여기에서 또한 찾는 것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때때로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만 가능하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 두 가지 방법의 결합만이 실제의 현실성을 확신하는 가장 강하고 가능한 근거로 만든다. 있을 법한 사실 하나만 가지면, 그것은 때와 장소에 조화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꾸민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혹은 예상치 못한 사실 하나만 가지면, 그것이 역사와 이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 방법을 결합하면 그것이 실제로 있었다는 그런 식의 가장 분명한 그림을 갖게 된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유대세계는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메시아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그가 어떠한 분일 것이라는 개념들을 갖고 있었다. 때가 찼고, 장소도 옳았고, 있을 법한 사실이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어느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를 꿈꾸었겠는가? 그들은 왕국을 기대하였으나 예수께서 가르쳤던 그런 왕국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있을 법한 사실과 예상치 못한 사실의 결합이다. 이 결합 속에 있는 진리는 수세기를 거쳐 받아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숀필드(Schonfield)는 이 결합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다.(무42) 그는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메시아로 내세울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 한 모든 일은 구약성경을 연구하여 의도적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메시아 예언들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주43) 심지어 이 십자가의 처형도 약물로 살아있도록 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군인이 창으로 찌르는 바람에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고, 예수는 죽었다고 숀필드는 억측한다.
그러나 숀필드가 생각지 못하는 것은 만약 예수께서 자기가 메시아였다는 것을 백성에게 믿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보았다면, 백성이 기대했던 방법으로 예언들이 성취되도록 진행했을 것이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속이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그것은 그분의 부활만큼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실의 실재가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매 순간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과 항상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일정하지 않은 모든 차이들은 신성한 것이고, 매끄러운 모든 있을 법한 사실들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사실에 제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주어진 시기의 문화와 같은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방법들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독자는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상치 못한 사실을 충분히 기대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예상치 못한 사실들의 어떤 것들은 순전히 인위적인 것일 수 있다. 복음서 이야기들에서 깜짝 놀랍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다가올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으냐고 서로 다투었고, 시기적으로 가장 나쁜 때에 그렇게 하였다. 이야기들은 제자들이 밝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왜? 왜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안되었는가에 관하여 많은 설명들이 제시되었다.(주44) 그러나 어떤 설명도 사실비평이 단순하게 그것이 있었던 사실 그대로이며, 이야기되어진 그대로이다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다.
(3)핵심 메시지를 결정하라
사실비평에서 있을 법한 사실과 예상치 못한 사실이외에도 각 구절에서 "핵심 메시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 메시지를 결정하라는 문구는 주석에서 몇 가지 관심들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어진다.
(a)중심 진리
만약 독자가 구절의 주목표(thrust)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 구절의 각각의 부분들을 적절하게 잘 해석해 나갈 것이다. 대개 중심 진리는 자료의 문단 한 곳에 요약되어져 있다. 비유가 한 가지 중심 교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 다른 단락들 또한 일정한 곳에서 그 단락들의 결론을 결정하는 기본 근거가 되는 단서들을 제시한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잃지 않고서는 구절에서 생략될 수 없는 필수조건이다. 각 부분의 이해는 만일 그 핵심 메시지와의 관계가 식별될 수 있다면 중요성을 갖게된다. 때때로 핵심 메시지--"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리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등장하고 있고 또한 단락들의 순서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마19:30; 20:16).
(b)저자 동기
많은 핵심 구절들이 관련되어진 것으로 나타날 때, 독자는 저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한 주제를 찾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캐드버리(Cadbury)는 저자의 동기들을 깊이 찾고자 하였다.
만약 독자가 흔한 형태의 전문용어로 비평의 단계들을 구별한다면, "동기비평"이란 말을 새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게될지도 모른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동기인식이 형태인식만큼이나 충분히 중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구결과는 동기비평, 형태비평, 자료비평, 그리고 이들 비평들 후에, 역사비평이어야 한다.(주45)
캐드버리는 복음서 저술들에서 계속해서 혼합된 동기들을 지적하였고, 그것들과 역사적인 것들과의 관계를 평가하였다. 그는 슈미에델이 그의 핵심 구절들을 역사적인 것으로 선포했던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슈미에델은 이 구절들이 예수를 밝히 제시하려는 동기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구절들이 꾸며진 것들이라면 저자의 기록 동기에 어긋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자료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반영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드버리는 다양한 동기들이 항상 실재하였다는 것, 한 가지 동기가 자료의 사용을 신속히 하기 위해서 또 다른 동기를 뒤엎었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동기의 근거 위에서는 그것의 역사성에 관하여 아무런 결론도 내려질 수 없었다는 입장을 지켰다. 캐드버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누가 그들이 제시하는 동기들이, 주장되어져 왔던 것처럼, 그것들을 좀 더 역사에 충실하게 하거나 혹은 꾸밀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말하겠는가?(주46)
캐드버리는 역사성을 확신할 수 있는 동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동기가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자료를 의심스럽게 보려는 그의 경향을 매우 조심스러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만약에 동기가 충분하다면 그 이야기는 역사이기보다는 창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요소도 포함되어야 한다. 전체로서 얼마나 신뢰할만한 기록인가? 있을 법한 사실과 예상치 못한 사실들의 결합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신뢰할만한 개인이 동기를 갖고 그 진리를 기록하는 것이 둘 다 동시에 가능하지 않는가? 이것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캐드버리의 나중 결론이 중요한 곳에 있다. 진실을 기록하리라고 신뢰가 가는 개인은 그의 동기가 분명하든 그렇지 않든 진실을 기록할 수 있다. 동기가 최종적으로 역사성을 입증하는 결론이 될 수는 없지만, 동기가 있으면 구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c)의무 적용
핵심 메시지의 중요성은 오늘의 적용에 중요한 역할을 포함시킨다. 구절의 요약진리는 그것의 중요성 안에서 우리의 현재 상황에로 확장되고, 오늘 여기에 사는 개인의 삶 속에서 그 의미의 중심이 된다. 이것은 독자들의 이어지는 각 세대에로 그 자체가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일종의 다리이다.
Ⅲ. 예문
사실비평이 성경 해석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나사렛에서 예수께서 배척 당하신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 4장 14-30절의 기록을 예로 들어 설명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제시된 연구의 요점만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있을 법한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 발견되는가? 그렇다. (1)삶에 진실 되다.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있을 법한 사실이다. (2)관습에 진실 되다. 회당에 참석하는 것(회당예배, 설교요청, 성경봉독, 견해피력)은 있을 법한 사실이다.(주47) (3)기대들이 진실 되다. 자기 지방 출신의 젊은이를 칭찬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있을 법한 사실이다(4:22).
예상치 못한 사실이 구절에서 발견되는가? 그렇다. (1)처음에 그들은 예수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다가 나중에는 죽이려고 하였다. (2)사건의 배치가 예상치 못한 곳이다. 누가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한 첫 사역으로 배치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갈릴리 사역 중반에 배치하고 있다. 또 누가 자신은 이 사건의 발생이 예수께서 가버나움 사역에서 얻은 명성을 언급함으로서 이 사건이 나중에 나왔어야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4:23). (3)예수는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나사렛에서는 행치 않으셨다. (4)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5)예수는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이방인들로부터 선택된 경우들을 제시하였다.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 말씀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분명하게 "내가 메시아이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는 그 성구의 목적과 동기들에 관하여 물어야 한다. 분명하게 이 사건이 예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이 사건을 여기에 배치하였는가? (1)이사야 예언의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고 있었던 사역형태를 소개하려고. (2)예수의 이 메시아 주장을 일찌감치 독자에게 제시하려고. (3)예수께서 이 시기에 하고 있었던 (특별히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서) 회당설교의 보기를 제시하려고. (4)갈릴리에서의 인기가 모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이려고. (5)독자를 예루살렘에서 죽음에로 이끌고 가는 배척에 대비토록 하기 위해서. (6)예수께서 그의 설교에 이방인들을 포함시켰다는 것을 이방 세계에 보이려고. 연대는 중요치 않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독자가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데 사용되어진다. 환영이 나사렛에서 배척으로 반전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작은 벽감(壁龕)에 두려고 하였지만, 그런 과소평가를 용납지 않으셨다("선지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 24절). (2)기적을 행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기를 거절하였다(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23절). (3)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하였다("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 21절). (4)하나님께서 유대인들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을 즐겨 도왔던 경우들을 예로 들었다(25-27절).
핵심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예수께서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가 예수를 위해 준비한 작은 장소는 그분에게 맞지 않는다. 예수의 능력이 우리들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삭감된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는 섬기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민족보다 뛰어난 민족에게 보이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고루 보이신다. 예수는 예언의 성취이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셨다. 독자 각자는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단하도록 되어 있다. 그분은 사실이다. 그분의 메시지는 사실이다. 그 결단은 사실이다.
Ⅳ. 결론: 하나의 가능한 방향
1. 부정적인 비평
금세기에 일어난 학문적인 성경비평에 관한 신속한 조사는 관심을 끄는 연구가 성경의 의미이해와 기독교인의 믿음에 대한 이상에 훨씬 못 미치는 주제들에 주로 초점이 맞춰졌고, 출발점들을 사용하였으며, 방법들을 채택하였고, 목표들을 세웠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주48)
2. 또 다른 접근 방법
본 연구에서 우리는 성경 그 자체의 기록에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말이 있었는가를 전할 목적으로 기록된 이야기로 성경의 기록을 취급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본질적으로 사건이나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주49) 또 혹자가 의미 있다고 부르기 좋아하는 재구성과 사건을 바꿔버리는 인기 많은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적어도 그 기록 내용에 담긴 사실적 자료에로 얼굴을 돌릴 수 있다. 그 기록과 함께 하는 이 사실적 출발이 바로 모든 것을 위한 진정한 출발점이다.
3. 있을 법한 사실
이야기의 있을 법한 사실과 함께 시작하라. 그 이야기가 기록된 발생사건들의 때와 장소에 어떻게 잘 들어맞는지를 보라. 이것을 겉으로 들어내는 최우선의 목적이 변증적인 이유들 때문은 아니다. 일단 그것이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보게되면, 그 구절의 의미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적인 가치는 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오늘의 "삶에 진실한" 것을 찾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있을 법한 사실이 거기에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증거가 일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주50) 좀더 점검들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조각들이 우리의 무지 때문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실제로 모순되는가? 우리들은 일부 차이점들을 기대할 수 있는가?
4. 예상치 못한 사실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일부 차이점들은 기대된다. 어떤 "예상치 못한 것들"은 사실을 확증한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메시아 왕이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상치 못한 것들"을 연구하는 것은 새로운 왕국과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이성이 기대하지 않을 일들이 있으나, 그것들이 알려질 때, 그것들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 일들도 있으나 그렇다고 이 사실이 그것들을 비역사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이야기들을 예상치 못한 사실과 함께 있을 법한 사실로 기록하는 바로 그 방법은 그것이 그런 방식으로 발생하였으며, 저자들이 사실을 적는데 충실하였다는 확신을 강화시킨다.
5. 핵심 메시지
앞에서 밝힌 대로, 저자가 기록하면서 가졌던 전체적인 목적, 저자가 이야기 속에 포함시킨 자료들의 각 단락들을 선별하면서 가졌던 동기, 자기의 복음을 펼쳐 보이는 순서, 특별한 구절에서 끄집어내기를 원했던 중심 진리에 대한 깊이 있는 파악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꿰매는 실은 각각의 이야기들, 즉 설교이든 기적이든, 사건이든 말씀이든 간에 그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되는 핵심 메시지들이다.
6. 믿음의 요소
만약 Realgeschichte를 번역해야 한다면, "사실비평"(factual criticism)으로 하면 될 것이다. Geschichte가 "비평"(criticism)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Formgeschichte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Geschichte란 말은 어떤 주장도 순수역사(Realhistorie)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 독자가 칸트(Kant)의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은, 폰 랑케(von Ranke)의 "어떻게 그것이 실재로 존재하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해석에 관한 것이지 궁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real)은 여전히 비평(Geschichte)과 결합되어 그 말이 사실적인 것들을 가리키게 한다. 이것은 신화, 설화, 전설의 틀 속에서 해설을 결합하는 것과 아주 다르며, 또는 저자들 대신에 편집자들을 강조하는 것과도 아주 다르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전제들을 반영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는 입장(direction) 속에 넣어둔 그들 이용도구들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 동일한 도구들은 신자들의 캠프들에서 그러나 성경의 진리들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부담 없이도 사용되어질 수 있다.(주51) 다양한 접근방법에서 수집한 정보는 이용될 수 있다. 삶의 정황(Sitz im Leben)는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형태는 문학적이든 설화적이든 모두 연구되어져야 한다. 저자의 동기들과 계획은 사실비평에서 본질적인 위치들을 점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은 솔질한 믿음으로 접근되어지고, 전승의 제3 혹은 제4 층보다는 본래의 발생과 말씀에 더 가까운 목표들에 조준되어진다. 이것은 덜 객관적일 필요가 없으나 의심을 품고 하는 접근보다는 더 객관적이 되도록 노력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하나님 당신을 한 역사적인 인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과거 한 차례 지상에 살기 위해서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사실은 믿음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 사건들은 실재적이었고, 그 기록들은 사실적이며, 그 진리들은 부인할 수 없다.
각주
*Lewis Foster박사는 Cincinnati Bible Seminary의 신약학 교수로 1987년에 은퇴하였다. Foster박사는 BA, MA, MDiv를 CBS에서 받고, BS를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받았으며, 다시 MDiv를 예일대학교에서 받고, STM과 PhD를 하바드 대학교에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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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F. C. Burkitt, The Gospel History and Its Transmission(Edinburgh: T. & T. Clark, 1911); H. J. Cadbury, "Mixed Motives in the Gospels,"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95/2(1951) 117-124; W. G. K mmel, The New Testament: The History of the Investigation of Its Problems(Nashville: Abingdon, 1972).
주3. S. Zeitlin, "The Halaka in the Gospels and Its Relation to the Jewish Law at the Time of Jesus," HUCA 1(1924) 357-373; S. Sandmel, The First Christian Century in Judaism and Christianity(New York: Oxford University, 1969.
주4. B.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Grand Rapids: Baker, 1970); A. Berkeley Mickelsen, Interpreting the Bible(Grand Rapids: Eerdmans, 1963); I. H. Marshall, ed., New Testament Interpretation(Grand Rapids: Eerdmans,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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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A. D. Nock, "Early Gentile Christianity and Its Hellenistic Background," in Essays on Religion and The Ancient World, vol. 1(Cambridge: Harvard, 1924, 1972).
주7. Ibid., p. 119.
주8. Ibid., p. 131.
주9. B. H. Streeter, The Four Gospels: A Study of Origins(London: Macmillan, 1924); W. A. Beardslee, Literary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Philadelphia: Fortress, 1970); E. de W. Burton, Som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 and Their Application to the Synoptic Problem(Chicago: University Press, 1904); B. C. Butler, The Originality of St. Matthew(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 W. R. Farmer, The Synoptic Problem(London: Collier-Macmillan, 1964); E. P. Sanders, The Tendencies of the Synoptic Tradi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주10. A. Harnack, The Sayings of Jesus(New York: Putnam's,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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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M. Debelius, From Tradition to Gospel(New York: Scribner's, 1934).
주15. Bultmann, History; see also W. G. Doty, "The Discipline and Literature of New Testament Form Criticism," ATR51(1969) 257-319; E. V. McKnight, What Is Form Criticism?(Philadelphia: Fortress, 1969).
주16. Cf. G. H. Clark, Historiography: Secular and Religious(Nutley: Craig, 1971) 177-178; cf. pp. 368-371.
주17. N. Perrin, What Is Redaction Criticism?(London: SPCK, 1970).
주18. W. Marxen, Der Evangelist Markus. Studien zur Redakitionsgeschichte des Evangeliums(G 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56, 1959) = Mark the Evangelist(New York: Abingdon, 1969); J. Rhode, Rediscovering the Teaching of the Evangelists(Philadelphia: Westminster, 1969).
주19. D. O. Via, Jr., "A Structuralist Approach to Paul's Old Testament Hermeneutic," Int28(1974) 201-220. "구조는, 적절하게 말하자면, 본문에서 다소 볼 수 있고 혹은 분명한 패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숨겨진 혹은 밑에 있는 외형이다"(p. 202). "성경해석의 목적으로 구조주의를 채택하고 또 채택하는 한 가지 필연적 결과는, 오래도록 대우받고 있는 역사적 접근방법이 원리에서 거부되지 않고 있고, 한 가지 적법하고 제한된 관점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는 한,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이고, 개개의 역사적 고려들은 동시발생적일 뿐이다는 것이다"(p. 201).
주20. See n. 29 below.
주21. A. M. Johnson, ed., The New Testament and Structuralism(Pittsburgh: Pickwick, 1976); A. M. Johnson, ed., Structuralism and Biblical Hermeneutics(Pittsburgh: Pickwick, 1979); A. M. Johnson, A Bibliography of Semiological and Structural Studies of Religion(Pittsburgh: Clifford E. Barbour Library, 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
주22. A. C. Thiselton, "Semantics and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in New Testament Interpretation(ed. Marshall) 75-104.
주23. A.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 The Language of the Gospel(London/New York: SCM/Harper, 1964); G. A. Kenned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1984).
주24. G. Ebeling, The Nature of Faith(Philadelphia: Muhlenberg, 1961) 187.
주25. P. Henry, New Directions in New Testament Study(Philadelphia: Westminster, 1979) 120-152.
주26. E. Fuchs, Studies of the Historical Jesus(London: SCM, 1964).
주27. A. C. Thiselton, "The New Hermeneutics," in New Testament Interpretation(ed, Marshall) 308-333.
주28. G. Ebeling, Theology and Proclamation(London: SCM, 1963) 38.
주29. B. F. Westcott and F. J. A. Hort,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Introduction and Appendix(New York: Harper, 1882); W. N. Pickering, The Identity of the New Testament Text(Nashville: Nelson, 1977); H. A. Sturz, The Byzantine Text-Type: New Testament Textual Criticism(Nashville: Nelson 1984); B. M.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Oxford: University Press, 1968).
주30. Cf. P. B. Payne, "The Fallacy of Equating Meaning with the Human Author's Intention," JETS 20(1977) 243-252.
주31. 불트만의 Fragestellung(Formulation of a question)은 일종의 일반 소개이다. 질문이 물어지는 방법은 종종 어떻게 그것이 대답되어지질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R. Bultmann, Existence and Faith(New York: Meridian, 1960) 346.
주32. R. C. F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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