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후천년설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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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후천년설의 입장
Postmillennialism(Loraine Boettner)
http://kccs.pe.kr/thesis061.htm
이 글은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 교리}(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1932), {신학연구}(Studies in Theology, 1947), {불멸}(Immortality, 1956), {로마 천주교주의}(Roman Catholicism, 1962) 등을 저술한 조직신학자, 로레인 보에트너(Loraine Boettner)가 [후천년설]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관한 "해석법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Loraine Boettner, "Postmillennialism,"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Four Views(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7). Edited by Robert G. Clouse. pp. 117-141.]
후천년설은 하나님의 왕국이 복음의 전파와 개개인의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지금 확장되고 있다는 것과 결국 세상은 기독교화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반적으로 일컫는 천년왕국인 의와 평화의 긴 시기 말에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종말론이다.
후천년설의 원칙들에 관하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거의 동시에 일반적 부활, 일반적 심판, 천국과 지옥의 완전한 시작이 뒤따를 것을 믿는다. 후천년설 주창자들이 기다리는 천년왕국은, 그러므로, 현 시대인 교회시대에서의 영적 번영의 황금시대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지금 활동적인 힘에 의해서 야기되어질 것이다. 그것은 문자적인 천년보다 아마 훨씬 더 긴 무한정한 오랜 기간동안 계속될 것이다. 개개인의 변화된 성격은 상승된 인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생활에서 반영될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는 현재까지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소외된 그룹들인 몇몇 가족단위, 몇몇 지역교회 그룹 또는 혈연 조직들에서만 보여졌던 의의 상태를 그 때는 즐기게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다거나 또는 모든 죄악이 말살될 시기가 이 땅위에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형태와 모양 속에 있는 죄악은 결국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몫으로 줄어들 것이며, 기독교 원리들이 제외 없이 지배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기독교화한 세계로 재림하실 것을 의미한다. 후천년설은 한발 더 나가서 복음의 우주적인 선포와 현 시대에 살고있는 모든 국가의 대다수 국민들의 궁극적인 회심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위임의 명백한 명령이요, 의미요, 약속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대 위임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말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국가에 증인으로써 전파된 복음의 형식적이고 외적인 선포는 물론, 참되고 효과적인 모든 국가의 복음화를 말하며, 그래서 백성의 심령과 삶이 복음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끝없는 압승과 정복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를 통해서 그의 제자들에게도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것은 아주 분명한 것 같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할 것은 물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을 것을 명령받았다. 그들이 사도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으나, 순전한 승전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 시대에 성령의 지시하심 아래서 복음의 전파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충족한 수단이다.
지난 19세기 동안 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이 임무를 극도로 태만히 하였으며, 우리 시대의 외침의 필요는 교회가 심각하게 교회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할 것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단에서 사회, 경 제, 정치적 문제 또는 세 적 지식이나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설교에 필요한 내용은 참된 복음적 설교이며, 삶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구원하도록 작성된 설교이다. 태만에 대한 책임은 목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 라, 평신도들에게도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증거 해야 하며, 간증이 나, 인쇄물이나, 선교를 위한 시간과 금전의 헌신적이고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보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세계 의 복음화를 명령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이 임무가 성취되기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잘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하시면서 교회를 칭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J. Marcellus Kik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 이방 신앙이나 교황의 교리에 남은 자가 아직도 있다는 것은 교회의 큰 실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초대교회에서 그랬던 것만큼이나 이 세 대에도 권능 있는 말씀이다. 복음의 능력은 종교개혁시대에 그랬던 것만큼이 나 금세기에도 강하다. 만약 오늘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초대 몇 세기 동안과 종교개혁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왕성하고, 용감하고, 정직하고, 기도 많이 하고, 믿음에 충실하다면, 이들 적들은 완전히 전멸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시기에 있어서, 즉 그리스도의 재림전후의 사건들에 관해서 전·후·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시게,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을 믿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모두는 한결같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다(딛 2:13).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하신 바울 사도의 말씀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 매우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죽은 자를 살리시며, 심판을 하시며, 결국 영원한 나라를 설립하실 것에 대해서 의견을 동의한다. 이들 견해의 어떤 것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적인 경향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에 의견을 일치하는 부분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부분보다 훨씬 중요하다. 바로 이점을 바탕으로 이들은 복음주의 자들로서 협력할 수 있도록 해야하며, 성경진리 전체l에 걸친 초자연적 역사를 크게 또는 작게 계속 부정하는 현대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연합 전선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
1. 부적당한 용어
우리가 항상 이 논란에서 직면하는 한가지 문제점은 부적당한 용어이다. 천년설이란 말에 전·후·무란 접두사를 붙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행이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전"이나 "후"란 말 이상으로 큰 차이점을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이 기대하는 천년왕국은 후천년설 주창자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왕국이 세워질 방법과 시간에 있어서 다를 뿐 아니라, 왕국의 성격과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방법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다르다.
후천년설 주창자들은 삶의 근본 사실들에 관한 한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살고있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황금시대를 기다린다. 세상의 주거민들이 더 많은 몫이 기독교로 개심할 때, 이 시대는 점차적으로 천년왕국시대로 유입된다. 결혼과 가정은 계속될 것이며, 현재와 같이 자연출산을 통해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인류에 합류될 것이다. 죄악은 제거되지 않을 것이나, 지상의 도덕적 영적 환경이 두드러지게 기독교화 하면, 최소로 줄어들 것이다. 사회, 경제, 교육문제는 남을 것이나, 원치 않는 요소는 크게 줄어들고 원하는 요소들이 크게 늘 것이다. 신앙과 실천에 관한 기독교 원칙들이 삶의 척도로 받아들여 질 것이며, 천년왕국에서의 삶은 오늘날의 기독교 공동사회에서의 삶과 이방인과 비신앙인들의 공동사회에서의 삶이 비교되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비교될 것이다. 진리 전파에 훨씬 더 열을 내며, 백성들의 삶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교회는 오늘날과 같이 지상 위에 하나님의 왕국의 외적이며 보이는 현시(顯示)로서 계속될 것 이 다. 그리고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최후심판으로 끝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후천년설 주창자들은 인간의 심령에 세워진 영적 왕국을 주장한다.
한편 전천년설 주창자들에 의해서 기대되는 천년왕국은 예루살렘에 계신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볼 수 있게 다스리는 왕국이다. 왕국은 오랜 기 간 동안 개개의 영혼들의 개심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권능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성도들처럼 개인적으로 개심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단체로 개심할 것을 믿는다. 이들 유대인들은 새 왕국에서 주요한 통치자들이 될 것을 말한다. 자연도 천년왕국의 축복을 나눌 것이며, 풍성하게 생산해낼 것을 믿는다. 심지어 사나운 들짐승들도 온순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죄악은 그리스도의 철장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이다. 천년왕국 말엽에는 성도들과 성스런 도시를 거의 압도할 무서운 반역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천년왕국 동안에는 영화롭게된 몸을 가진 성도들이 아직도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인간들과 자유롭게 섞여 살 것으로 믿는다.
특별히 이 요소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왕국은 새 땅과 영화롭게된 죄 없는 인간성과 옛 땅과 죄 많은 인간성이 혼합하여 사는 혼합왕국 형태이다. 그리스도와 다시 죽지 않을 부활의 몸인 성도들이, 많은 죄 와 죽음과 부패가 여전히 계속되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사는 혼합왕국이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이 세상의 죄 많은 환경에 다시 살도록 불러오는 것은 천국에 죄를 들여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무천년설 주창자 윌리엄 J. 그리엘(William J. Grier)가 지적한 대로, 그와 같은 무리는 정말로 "혼합모임"(Mixtum gatherum)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는 물론, 후천년설이나 전천년설 모두를 반대한다. 그들은 언어적 의미에서의 어떠한 천년왕국도 전혀 없을 것이라고 항상 주장한다. 그론 이유로 해서 일부 신학자들은 그들은 전, 후 또는 무천년설이란 접두어조차 붙이기를 주저한다. 어떻든 이들 접두어 이상으로 적당한 용어는 없다. 이것들은 각기 다른 학파의 사상을 구별해 주는 역할을 하며, 그 의미도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세 학파가 천년설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 각기 다르다고 해서, 용어 자체가 의미 없다거나 신학체계 사이의 구별이 상상적이거나 중요치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실제로 이들 체계들은 우리가 보게될 훨씬 멀리 미치는 결과들을 갖고 있는 이 매우 중요한 주제에 관하여 폭넓은 여러 가지의 견해를 대표한다. 더 넓고 더 정확할지도 모를 용어가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제안되었다. 이들은 천년설 주창자들(Chiliasts) 또는 반(反) 천년설 주창자들(Anti-chiliasts)이다. 천년설 주창자들은 전천년설과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 주창자들을 포함하고, 반(反) 천년설 주창자들은 구분 없이 무천년설과 후천년설 주창자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자신을 무천년설 주창자로 표명하는 일부 학자들은 현재교회 시대가 천년왕국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시대의 말엽에 오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이 그들을 후천년설 주창자들로 만드는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되듯, 후천년설 주창자들의 최우선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의와 평강의 황금시대를 뒤따라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전체 교회시대를 천년왕국으로서 간주하는 이들은 보편적으로 후천년설 주창자로 볼 수 없다.
2. 구속된 세상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우주성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고, 전 인류의 믿을 수 없는 큰 무리가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나오고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것이 세상 또는 인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이었던 것도 세상 또는 인류였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종족만의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땅에 큰 임금"이 되시고(시 47:2), "온 땅의 주"가 되신다고 기술하고 있다(시 97:5). 주가 생각하신 구원은, 작고 선택된 그룹 또는 좋아하는 몇몇만에 제한될 수 없다. 구속의 복된 소식은 팔레스타인의 몇몇 마을을 위한 지방 뉴스가 아니라, 세계적인 메시지였으며, 성경의 풍부하고 계 속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왕국이 지상에 가득할 것이며,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3:10)고 하셨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앞과 어린양 앞에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하나님은 인류의 셀 수 업는 수백만을 구속하기로 선택하셨다. 어느 비율만큼이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목적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 우리는 모르나, 교회에 약속된 장래의 번영이란 관점에서 볼 때, 큰 비율인 대다수가 결국 구원의 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가르치고 있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죽은 유아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미 인류의 큰 몫이 구원받고 있다. 잃어버린 자보다도 구원받은 자의 수가 훨씬 많다는 생각은 성경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 천국은 획일적으로 큰 왕국으로, 국가로, 도시로 오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고, 한편 지옥은 획일적으로 감옥, 불뭇 또는 유황 불못으로 깊고 좁은 구덩이와 같이 비교적 작은 장소로 나타나고 있다(눅 20:34; 계 21:1; 마 5:3; 히 11:16; 벧전 3:19; 계 19:20; 21:8~16). 성경에서 천사나 성도를 말할 때에 만군으로, 수만으로, 셀 수 없는 수로, "만만이요 천천"으로 그리고 수억이라고 말하고 있다(눅 2:13; 사 6:3; 계 5:11). 그러나 이와 같은 수가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전혀 사용된 적이 없다. 대조해 볼 때, 그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다고 나타난다. 계시록 20장 11~15절의 온 백보좌 심판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 말씀은 심판에서의 규범은 생명책에 자기 이름을 갖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와 같은 말씀은 자기 이름이 거기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이 많지 않은, 드문,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을 의미한다.
W. G. T 세드(Dr. W. G. T. Shedd) 박사는 그의 {교리신학}(Dogmatic Theology vol. 2)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택의 원은 천계의 큰 원이며, 조그만 원이 아니다. 사단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원과 비교해서 중요치 않다. 하나님의 지배의 거대한 범위에서 볼 때, 선이 원칙적이고, 악은 예외이다. 죄악은 영원한 푸른 창공 위에 한 점의 얼룩점 또는 태양 위의 한 점에 불과하다. 지옥은 단지 우주의 한 구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들로 판단해 볼 때, 우리가 어림짐작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 공화국에 자유시민의 수가 감옥에 있는 자들과 소년원에 있는 수보다 월등하게 많은 것 같이 구원받은 자의 수가 잃는 자의 수보다 월등히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또는 구원받은 자의 수를 울창한 나무 전체에 비교한다면, 잃은 자의 수는 몇 개의 마른 가지나 꺾이운 가지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후천년설이 제안할 수 있는 기대이다. 다른 설을 믿는 자라도 누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3. 세계의 영적 진보
생략.
4. 성경 해석의 원칙
모든 왕국설은 그들의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신성과 충실성을 의심할 바 없는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어왔다는 것이 분명한 일이다. 수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다같이 믿고,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성경의 권위를 다같이 인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꽤 다른 결론에 각기 도달한 이유는 우선적으로 성경해석방법의 차이 때문이다. 전천년설 주창자는 문자적 해석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고, 성경이 기록된 대로 말씀을 취하는 점에 그들 자신을 뽐내고 있다. 한편 후천년설과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신구약 모든 성경의 상당수가 의심할 여지없이 비유적 또는 상징적 언어로 쓰여졌다고 믿기 때문에, 비유적 해석에 대해 반대를 갖지 않으며, 비유적이라는 증거가 확실하면 비유적으로 해석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 점을 두고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 주창자들에게 성경의 일부를 설명으로 유야 무야 시킨다느니 반대한다느니 하면서 꼬집는다. 어떤 전천년설 주창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성경해석의 단 한가지 일반적인 법칙이 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만 하며, 예언은 진리의 다른 측면들에 못지 않게 언해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 . . 역사는 역사지 우화가 아니다. 사실은 사실이다. 예언된 미래의 사건들은 그들이 예언된 그대로 일어난다.
이 해석의 일반적 원칙은 "가능한 곳은 어디든지 문자적으로"(H. Boner)또는 불합리하지 않는 한 문자적으로"(Govett) 표현되어지고 있다. 독자는 모든 것이 다 문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좀더 읽을 필요조차 없다. 제시 F. 실버(Jesse F. Silver)는 어떤 "다른 뜻"이 정해진 곳은 "확실한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곳이 인식될 수 있는 어떤 법칙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은 문자적으로 취하라" 또는 "저것은 비유적으로 취하라"고 성경 자체가 우리들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분명히 독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판단력을 이용하여 야 한다. 이 판단력은 많은 경험과 독자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상식선을 말한다. 그리고 물론 개인에 따라서 이 판단력은 크게 차이가 난다.
문자적 해석에 대해서 그가 의미하는 것의 예로써, 실버(Siver)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지적하는 모든 예언은 글자 하나 하나 상세하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진술을 다른 많은 전천년설 주창자들도 실질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렇지 않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메시지적 예언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뱀에 관한 저주를 선언하시면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예언은 남자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거나, 뱀이 남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함으로써 분명히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시고, 십자가상에서 마귀와 악한 모든 세력을 이기시고 승천하셨을 때, 상당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에서 최후의 예언은 말라기 4장 5절에서 발견된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 예언 역시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것은 성령과 엘리야의 권능으로 오신 세례 요한의 인격에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마 11:14). 이사야의 예언을 보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 하셨느니라(이사야 40:3~5).
이 말씀은 분명히 팔레스타인의 고속도로 설치계획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공생애의 사역을 위한 길을 닦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성취되었다. 마태와 누가는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고 했고, 이들 이사야의 말씀들을 누가는 인용하여 실었다. 스불론과 납달리의 사람들에 관한 이사야 9장 1~2절의 말씀은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성취된다. 마태는 말하기를,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리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하셨느니라(마 4:12~16).
여기서 이사야는 분명히 죄가 다스리는 곳은 어디든지 존재하는 영적 어두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땅들에 가져오실 영적 빛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비유적인 언어 속에 있는 많은 다른 구약 예언들도 인용할 수 있겠으나, "그리스도의 초림을 지적하는 모든 예언은 글자 하나 하나 상세하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기에 이들 예문들만으로도 확실히 충분하다. 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비유적 또는 상징적 언어로 쓰여졌고, 무리한 상상으로도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이에게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 진술들을 영적으로 푼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들 말씀의 참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단지 몇몇 예문만 인용하자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매우 산문적인 역사기록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방어적 능력이 다음과 같은 말속에 나타나 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기술되고 있다(출 3:8). 시편 23편이나 91편을 읽어보면 거의 계속적인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어떤 예언이나 다른 진술들을 영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설명으로 유야 무야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것들의 참된 의미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자주 예언들을 지상 수준으로 끌어내려 그것들을 물질화하고 문자화하며, 그것들의 참되고 더 깊은 의미를 왜곡한다. 그것이 정확히 유대인들이 메시아 예언의 해석에서 법한 오류이다. 그들은 지상 왕국과 정치적 통치자를 기다리는 문자적 성취를 기대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구속적 요소를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절하였으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초림과 연관해서 볼 때, 문자적 해석의 무서운 결과는 같은 실수를 재림에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있다. 예언에 따라서는 때로 성취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은 특별히 역사적이고 좀더 교훈적인 부분은 비록 그들 속에 약간의 비유적인 표현이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문자적으로 이해되어 야 한다. 그러나 많은 다른 부분은 반드시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역시 분명히 증거적이다. 심지어 전천년설 주창자들도 많은 표현들을 상징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넌센스가 되고 만다. 성경이 그 내용의 무엇이 문자적이고 무엇이 비유적인지(상징적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견고하고 신속한 법칙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료의 성격과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스타일과 목적을 연구해야 하며, 그때 더 좋은 용어의 결핍에 대해 우리가 "상식을 성화한다"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의지하게 된다. 우리들은 모두 생각하는 것이 같지 않고, 보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결론은 개인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참된 후천년설이 내내 초자연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거의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전천년설과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때때로 후천년설을 인문주의적 및 진화론적 과정을 통한 세상의 회심을 가르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주의는 초자연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수단에 의해서 세상의 향상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때때로 어떤 반대자들은 후천년설을 마치 현대주의인양 이야기한다. 무리한 상상으로도 그와 같은 체계가 후천년설이라고 불릴만한 어떠한 도덕적 진리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후천년설이란 용어가 역사적으로 사용되어진 의미가 아니다. 그와 같은 류의 주석은 너무 부당한 비평이다. 후천년설을 대표하는 신학자들인 어거스틴, 브라운, 핫지(Hodge), 다브니(Dabney), 그리고 워필드(Warfield) 같은 이들은 초자연적 역사를 믿는 이들이었으며, 성경의 백퍼센트 영감과 권위를 그리고 개개인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성령의 중생의 사역을 믿는 이들이었다.
한편 오늘날 현대주의의 특이한 형태는 초자연적 역사를 크고 작게 계속 부정하고 있으며, 성경의 완전한 영감,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피의 구속, 기적, 최후의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부정한다. 그것은 최우선적으로 이 세상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교육, 사회, 경제적 진보, 개선된 건강, 자금과 노동사이의 개선된 관계 등을 통한 세상의 개혁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진척되기만 하면 좋은 것들이며, 가능하다면 권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직 참된 기독교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관한 다른 견해들이 주장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진리탐구를 위한 참된 노력을 막아서는 안 된다. 신학분야에서의 이러한 상황은 의학의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이 분야에서도 훌륭한 의사들이 일정한 병에 대해 어떻게 치료를 가해야 한다든지 어떻게 인체는 보존되어야 한다든지 하면서 각기 다른 견해를 취하고있다. 예를 들자면, 의사도 있고, 척추교정지압가도 있고, 정골요법의사도 있고, 외과의사도 있고, 식이요법전문의도 있고, 신체운동을 열심히 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건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데 저해 요소가 되지 않으며, 건강유지를 위해서 최상의 방법을 찾는데 방해요소가 되지 않으며, 설사 우리가 잘못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부터 당하는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치 않는다.
정치나 정치적 수완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정당을 가지고있다. 공화당도 있고, 민주당도 있고, 사회주의, 노동당 심지어 공산당도 있다. 각 당은 어떻게 국가가 다스려져야 하는가에 대한 각기 다른 원리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선거 때에 매우 투쟁적인 다른 견해들을 듣는다. 교육과 교회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다. 이들 각각의 측면에서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고 가능하다면 과실에서 진리를 구별해 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일획에 의해서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문제들에 관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삶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경을 영감과 권위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의견의 차이들이 논쟁을 위한 토대나 정통의 시비로(tests of orthodoxy) 삼기보다는 오히려 선입견 없는 주석과 우호적인 토론으로 언제나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일반적인 법칙으로써,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더 그들의 견해를 기초하고 있는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들의 체계를 수용하지 않는 자들은 성경에 대한 낮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변함 없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느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독자는 전천년설 저술을 통해서 오직 그들만이 주의 재림을 완전히 믿는 것 같은 인상을 쉽사리 받을 것이다.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몸소 다스리는 지상왕국에서의 통치에 의문을 던진다면,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습니까?"와 같은 질문에 봉착하게 될 것이며, 이는 일부 시대구분론적 학파에서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이들 성경대학들의 요강을 보면 대부분이 전천년설을 믿는 자들에 한해서 교수 요원을 채용하고 있다. 어떤 학교는 학생이 이 견해를 수용치 않을 경우 졸업시키기를 꺼리며, 적어도 그에게 나쁜 점수를 줄 것이다. 예언 협의회 서적에는 일방적인 미래주의를 제시하고있고, 반대 견해는 복음주의가 아니라는 추론을 권장한다. 어떤 학자는 전천년설을 취미삼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거의 모든 예언, 환상 그리고 약속에서 특이할만한 재간으로 전천년설의 주장을 끌어내어, 설교를 통해 과도하게 그것을 주장한다. 그레이(Gray)는 적어도 300개 이상의 신약성경의 참고 구절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두고 있다. 그리고 몰간(Morgan)은 신약성경에서 평균 25절에 한 절이 전천년설을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본질적인 요소로(nonessentials) 취급되어야할 후, 무, 전천년설 주창자들 사이의 차이가 실제로 교회를 분단시키고 있고, 기독교인 교제(Christian fellowship)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시대구분론적 극단주의자들의 변덕들이 - 여호와 증인, 천년왕국의 서광을 부르짖는 자들(Millennial Dawnists),[역자주: Millennial Dawn은 여호와 증인의 창시자인 찰스 태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이 쓴 일련의 조직신학서 임.] 몇몇 오순절 거룩교 그룹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에도 있다 - 그리스도인들을 불가지론 그룹으로 분단시켰고, 기독교의 대의(大義)에 많은 해를 끼쳤다.
이들 문제들을 의논함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꼭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1)복음주의적 후천년설, 무천년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성경이 완전한 영감과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의 성격에 관해서 다르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내용에 있어서 다르다. 2)세 가지 천년설 모두 다 예수의 초림을 믿고 있고, 재림이 있을 것을 믿으며, 이 재림은 친히 볼 수 있게, 영화스럽게 그리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와 같이 객관적일 것을 믿는다.
교회는 토론해 왔고, 결론에 도달했으며, 믿음의 다른 위대한 가르침(교리)으로써 교회의 신조에 이들 결론들이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 첨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말론의 주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그리스도께서 세우고 계시는 왕국 또는 이 세상에 세우실 왕국의 종류는 일치된 의견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적으로 모든 분파에 있어서 교회는 왕국 해석들의 어느 하나도 신조의 조항에 포함시킬 것을 거절하였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건을 믿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인 형제로써 수용할 것을 오히려 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시간에 관하여는 매우 분명한 견해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구호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 모든 일에는 사랑"이 되어야 할 것 같다.[역자주: 보에트너(Boettner) 박사가 제안한 구호는 1809년 그리스도 교회의 시조인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이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 of the Christian Association of Washington)에서 교회의 분열을 막고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교회가 연합할 것을 제안한 내용으로써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통적인 구호가 되고 있다.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Postmillennialism(Loraine Boettner)
http://kccs.pe.kr/thesis061.htm
이 글은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 교리}(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1932), {신학연구}(Studies in Theology, 1947), {불멸}(Immortality, 1956), {로마 천주교주의}(Roman Catholicism, 1962) 등을 저술한 조직신학자, 로레인 보에트너(Loraine Boettner)가 [후천년설]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관한 "해석법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Loraine Boettner, "Postmillennialism,"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Four Views(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7). Edited by Robert G. Clouse. pp. 117-141.]
후천년설은 하나님의 왕국이 복음의 전파와 개개인의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지금 확장되고 있다는 것과 결국 세상은 기독교화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반적으로 일컫는 천년왕국인 의와 평화의 긴 시기 말에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종말론이다.
후천년설의 원칙들에 관하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거의 동시에 일반적 부활, 일반적 심판, 천국과 지옥의 완전한 시작이 뒤따를 것을 믿는다. 후천년설 주창자들이 기다리는 천년왕국은, 그러므로, 현 시대인 교회시대에서의 영적 번영의 황금시대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지금 활동적인 힘에 의해서 야기되어질 것이다. 그것은 문자적인 천년보다 아마 훨씬 더 긴 무한정한 오랜 기간동안 계속될 것이다. 개개인의 변화된 성격은 상승된 인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생활에서 반영될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는 현재까지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소외된 그룹들인 몇몇 가족단위, 몇몇 지역교회 그룹 또는 혈연 조직들에서만 보여졌던 의의 상태를 그 때는 즐기게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다거나 또는 모든 죄악이 말살될 시기가 이 땅위에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형태와 모양 속에 있는 죄악은 결국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몫으로 줄어들 것이며, 기독교 원리들이 제외 없이 지배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기독교화한 세계로 재림하실 것을 의미한다. 후천년설은 한발 더 나가서 복음의 우주적인 선포와 현 시대에 살고있는 모든 국가의 대다수 국민들의 궁극적인 회심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위임의 명백한 명령이요, 의미요, 약속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대 위임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말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국가에 증인으로써 전파된 복음의 형식적이고 외적인 선포는 물론, 참되고 효과적인 모든 국가의 복음화를 말하며, 그래서 백성의 심령과 삶이 복음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끝없는 압승과 정복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를 통해서 그의 제자들에게도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것은 아주 분명한 것 같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할 것은 물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을 것을 명령받았다. 그들이 사도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으나, 순전한 승전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 시대에 성령의 지시하심 아래서 복음의 전파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충족한 수단이다.
지난 19세기 동안 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이 임무를 극도로 태만히 하였으며, 우리 시대의 외침의 필요는 교회가 심각하게 교회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할 것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단에서 사회, 경 제, 정치적 문제 또는 세 적 지식이나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설교에 필요한 내용은 참된 복음적 설교이며, 삶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구원하도록 작성된 설교이다. 태만에 대한 책임은 목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 라, 평신도들에게도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증거 해야 하며, 간증이 나, 인쇄물이나, 선교를 위한 시간과 금전의 헌신적이고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보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세계 의 복음화를 명령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이 임무가 성취되기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잘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하시면서 교회를 칭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J. Marcellus Kik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 이방 신앙이나 교황의 교리에 남은 자가 아직도 있다는 것은 교회의 큰 실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초대교회에서 그랬던 것만큼이나 이 세 대에도 권능 있는 말씀이다. 복음의 능력은 종교개혁시대에 그랬던 것만큼이 나 금세기에도 강하다. 만약 오늘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초대 몇 세기 동안과 종교개혁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왕성하고, 용감하고, 정직하고, 기도 많이 하고, 믿음에 충실하다면, 이들 적들은 완전히 전멸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시기에 있어서, 즉 그리스도의 재림전후의 사건들에 관해서 전·후·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시게,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을 믿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모두는 한결같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다(딛 2:13).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하신 바울 사도의 말씀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 매우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죽은 자를 살리시며, 심판을 하시며, 결국 영원한 나라를 설립하실 것에 대해서 의견을 동의한다. 이들 견해의 어떤 것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적인 경향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에 의견을 일치하는 부분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부분보다 훨씬 중요하다. 바로 이점을 바탕으로 이들은 복음주의 자들로서 협력할 수 있도록 해야하며, 성경진리 전체l에 걸친 초자연적 역사를 크게 또는 작게 계속 부정하는 현대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연합 전선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
1. 부적당한 용어
우리가 항상 이 논란에서 직면하는 한가지 문제점은 부적당한 용어이다. 천년설이란 말에 전·후·무란 접두사를 붙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행이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전"이나 "후"란 말 이상으로 큰 차이점을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이 기대하는 천년왕국은 후천년설 주창자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왕국이 세워질 방법과 시간에 있어서 다를 뿐 아니라, 왕국의 성격과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방법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다르다.
후천년설 주창자들은 삶의 근본 사실들에 관한 한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살고있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황금시대를 기다린다. 세상의 주거민들이 더 많은 몫이 기독교로 개심할 때, 이 시대는 점차적으로 천년왕국시대로 유입된다. 결혼과 가정은 계속될 것이며, 현재와 같이 자연출산을 통해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인류에 합류될 것이다. 죄악은 제거되지 않을 것이나, 지상의 도덕적 영적 환경이 두드러지게 기독교화 하면, 최소로 줄어들 것이다. 사회, 경제, 교육문제는 남을 것이나, 원치 않는 요소는 크게 줄어들고 원하는 요소들이 크게 늘 것이다. 신앙과 실천에 관한 기독교 원칙들이 삶의 척도로 받아들여 질 것이며, 천년왕국에서의 삶은 오늘날의 기독교 공동사회에서의 삶과 이방인과 비신앙인들의 공동사회에서의 삶이 비교되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비교될 것이다. 진리 전파에 훨씬 더 열을 내며, 백성들의 삶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교회는 오늘날과 같이 지상 위에 하나님의 왕국의 외적이며 보이는 현시(顯示)로서 계속될 것 이 다. 그리고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최후심판으로 끝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후천년설 주창자들은 인간의 심령에 세워진 영적 왕국을 주장한다.
한편 전천년설 주창자들에 의해서 기대되는 천년왕국은 예루살렘에 계신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볼 수 있게 다스리는 왕국이다. 왕국은 오랜 기 간 동안 개개의 영혼들의 개심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권능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성도들처럼 개인적으로 개심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단체로 개심할 것을 믿는다. 이들 유대인들은 새 왕국에서 주요한 통치자들이 될 것을 말한다. 자연도 천년왕국의 축복을 나눌 것이며, 풍성하게 생산해낼 것을 믿는다. 심지어 사나운 들짐승들도 온순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죄악은 그리스도의 철장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이다. 천년왕국 말엽에는 성도들과 성스런 도시를 거의 압도할 무서운 반역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천년왕국 동안에는 영화롭게된 몸을 가진 성도들이 아직도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인간들과 자유롭게 섞여 살 것으로 믿는다.
특별히 이 요소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왕국은 새 땅과 영화롭게된 죄 없는 인간성과 옛 땅과 죄 많은 인간성이 혼합하여 사는 혼합왕국 형태이다. 그리스도와 다시 죽지 않을 부활의 몸인 성도들이, 많은 죄 와 죽음과 부패가 여전히 계속되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사는 혼합왕국이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이 세상의 죄 많은 환경에 다시 살도록 불러오는 것은 천국에 죄를 들여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무천년설 주창자 윌리엄 J. 그리엘(William J. Grier)가 지적한 대로, 그와 같은 무리는 정말로 "혼합모임"(Mixtum gatherum)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는 물론, 후천년설이나 전천년설 모두를 반대한다. 그들은 언어적 의미에서의 어떠한 천년왕국도 전혀 없을 것이라고 항상 주장한다. 그론 이유로 해서 일부 신학자들은 그들은 전, 후 또는 무천년설이란 접두어조차 붙이기를 주저한다. 어떻든 이들 접두어 이상으로 적당한 용어는 없다. 이것들은 각기 다른 학파의 사상을 구별해 주는 역할을 하며, 그 의미도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세 학파가 천년설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 각기 다르다고 해서, 용어 자체가 의미 없다거나 신학체계 사이의 구별이 상상적이거나 중요치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실제로 이들 체계들은 우리가 보게될 훨씬 멀리 미치는 결과들을 갖고 있는 이 매우 중요한 주제에 관하여 폭넓은 여러 가지의 견해를 대표한다. 더 넓고 더 정확할지도 모를 용어가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제안되었다. 이들은 천년설 주창자들(Chiliasts) 또는 반(反) 천년설 주창자들(Anti-chiliasts)이다. 천년설 주창자들은 전천년설과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 주창자들을 포함하고, 반(反) 천년설 주창자들은 구분 없이 무천년설과 후천년설 주창자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자신을 무천년설 주창자로 표명하는 일부 학자들은 현재교회 시대가 천년왕국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시대의 말엽에 오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이 그들을 후천년설 주창자들로 만드는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되듯, 후천년설 주창자들의 최우선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의와 평강의 황금시대를 뒤따라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전체 교회시대를 천년왕국으로서 간주하는 이들은 보편적으로 후천년설 주창자로 볼 수 없다.
2. 구속된 세상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우주성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고, 전 인류의 믿을 수 없는 큰 무리가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나오고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것이 세상 또는 인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이었던 것도 세상 또는 인류였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종족만의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땅에 큰 임금"이 되시고(시 47:2), "온 땅의 주"가 되신다고 기술하고 있다(시 97:5). 주가 생각하신 구원은, 작고 선택된 그룹 또는 좋아하는 몇몇만에 제한될 수 없다. 구속의 복된 소식은 팔레스타인의 몇몇 마을을 위한 지방 뉴스가 아니라, 세계적인 메시지였으며, 성경의 풍부하고 계 속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왕국이 지상에 가득할 것이며,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3:10)고 하셨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앞과 어린양 앞에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하나님은 인류의 셀 수 업는 수백만을 구속하기로 선택하셨다. 어느 비율만큼이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목적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 우리는 모르나, 교회에 약속된 장래의 번영이란 관점에서 볼 때, 큰 비율인 대다수가 결국 구원의 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가르치고 있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죽은 유아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미 인류의 큰 몫이 구원받고 있다. 잃어버린 자보다도 구원받은 자의 수가 훨씬 많다는 생각은 성경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 천국은 획일적으로 큰 왕국으로, 국가로, 도시로 오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고, 한편 지옥은 획일적으로 감옥, 불뭇 또는 유황 불못으로 깊고 좁은 구덩이와 같이 비교적 작은 장소로 나타나고 있다(눅 20:34; 계 21:1; 마 5:3; 히 11:16; 벧전 3:19; 계 19:20; 21:8~16). 성경에서 천사나 성도를 말할 때에 만군으로, 수만으로, 셀 수 없는 수로, "만만이요 천천"으로 그리고 수억이라고 말하고 있다(눅 2:13; 사 6:3; 계 5:11). 그러나 이와 같은 수가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전혀 사용된 적이 없다. 대조해 볼 때, 그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다고 나타난다. 계시록 20장 11~15절의 온 백보좌 심판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 말씀은 심판에서의 규범은 생명책에 자기 이름을 갖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와 같은 말씀은 자기 이름이 거기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이 많지 않은, 드문,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을 의미한다.
W. G. T 세드(Dr. W. G. T. Shedd) 박사는 그의 {교리신학}(Dogmatic Theology vol. 2)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택의 원은 천계의 큰 원이며, 조그만 원이 아니다. 사단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원과 비교해서 중요치 않다. 하나님의 지배의 거대한 범위에서 볼 때, 선이 원칙적이고, 악은 예외이다. 죄악은 영원한 푸른 창공 위에 한 점의 얼룩점 또는 태양 위의 한 점에 불과하다. 지옥은 단지 우주의 한 구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들로 판단해 볼 때, 우리가 어림짐작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 공화국에 자유시민의 수가 감옥에 있는 자들과 소년원에 있는 수보다 월등하게 많은 것 같이 구원받은 자의 수가 잃는 자의 수보다 월등히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또는 구원받은 자의 수를 울창한 나무 전체에 비교한다면, 잃은 자의 수는 몇 개의 마른 가지나 꺾이운 가지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후천년설이 제안할 수 있는 기대이다. 다른 설을 믿는 자라도 누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3. 세계의 영적 진보
생략.
4. 성경 해석의 원칙
모든 왕국설은 그들의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신성과 충실성을 의심할 바 없는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어왔다는 것이 분명한 일이다. 수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다같이 믿고,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성경의 권위를 다같이 인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꽤 다른 결론에 각기 도달한 이유는 우선적으로 성경해석방법의 차이 때문이다. 전천년설 주창자는 문자적 해석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고, 성경이 기록된 대로 말씀을 취하는 점에 그들 자신을 뽐내고 있다. 한편 후천년설과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신구약 모든 성경의 상당수가 의심할 여지없이 비유적 또는 상징적 언어로 쓰여졌다고 믿기 때문에, 비유적 해석에 대해 반대를 갖지 않으며, 비유적이라는 증거가 확실하면 비유적으로 해석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 점을 두고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 주창자들에게 성경의 일부를 설명으로 유야 무야 시킨다느니 반대한다느니 하면서 꼬집는다. 어떤 전천년설 주창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성경해석의 단 한가지 일반적인 법칙이 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만 하며, 예언은 진리의 다른 측면들에 못지 않게 언해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 . . 역사는 역사지 우화가 아니다. 사실은 사실이다. 예언된 미래의 사건들은 그들이 예언된 그대로 일어난다.
이 해석의 일반적 원칙은 "가능한 곳은 어디든지 문자적으로"(H. Boner)또는 불합리하지 않는 한 문자적으로"(Govett) 표현되어지고 있다. 독자는 모든 것이 다 문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좀더 읽을 필요조차 없다. 제시 F. 실버(Jesse F. Silver)는 어떤 "다른 뜻"이 정해진 곳은 "확실한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곳이 인식될 수 있는 어떤 법칙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은 문자적으로 취하라" 또는 "저것은 비유적으로 취하라"고 성경 자체가 우리들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분명히 독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판단력을 이용하여 야 한다. 이 판단력은 많은 경험과 독자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상식선을 말한다. 그리고 물론 개인에 따라서 이 판단력은 크게 차이가 난다.
문자적 해석에 대해서 그가 의미하는 것의 예로써, 실버(Siver)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지적하는 모든 예언은 글자 하나 하나 상세하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진술을 다른 많은 전천년설 주창자들도 실질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렇지 않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메시지적 예언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뱀에 관한 저주를 선언하시면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예언은 남자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거나, 뱀이 남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함으로써 분명히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시고, 십자가상에서 마귀와 악한 모든 세력을 이기시고 승천하셨을 때, 상당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에서 최후의 예언은 말라기 4장 5절에서 발견된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 예언 역시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것은 성령과 엘리야의 권능으로 오신 세례 요한의 인격에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마 11:14). 이사야의 예언을 보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 하셨느니라(이사야 40:3~5).
이 말씀은 분명히 팔레스타인의 고속도로 설치계획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공생애의 사역을 위한 길을 닦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성취되었다. 마태와 누가는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고 했고, 이들 이사야의 말씀들을 누가는 인용하여 실었다. 스불론과 납달리의 사람들에 관한 이사야 9장 1~2절의 말씀은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성취된다. 마태는 말하기를,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리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하셨느니라(마 4:12~16).
여기서 이사야는 분명히 죄가 다스리는 곳은 어디든지 존재하는 영적 어두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땅들에 가져오실 영적 빛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비유적인 언어 속에 있는 많은 다른 구약 예언들도 인용할 수 있겠으나, "그리스도의 초림을 지적하는 모든 예언은 글자 하나 하나 상세하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기에 이들 예문들만으로도 확실히 충분하다. 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비유적 또는 상징적 언어로 쓰여졌고, 무리한 상상으로도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이에게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 진술들을 영적으로 푼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들 말씀의 참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단지 몇몇 예문만 인용하자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매우 산문적인 역사기록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방어적 능력이 다음과 같은 말속에 나타나 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기술되고 있다(출 3:8). 시편 23편이나 91편을 읽어보면 거의 계속적인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어떤 예언이나 다른 진술들을 영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설명으로 유야 무야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것들의 참된 의미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자주 예언들을 지상 수준으로 끌어내려 그것들을 물질화하고 문자화하며, 그것들의 참되고 더 깊은 의미를 왜곡한다. 그것이 정확히 유대인들이 메시아 예언의 해석에서 법한 오류이다. 그들은 지상 왕국과 정치적 통치자를 기다리는 문자적 성취를 기대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구속적 요소를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절하였으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초림과 연관해서 볼 때, 문자적 해석의 무서운 결과는 같은 실수를 재림에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있다. 예언에 따라서는 때로 성취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은 특별히 역사적이고 좀더 교훈적인 부분은 비록 그들 속에 약간의 비유적인 표현이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문자적으로 이해되어 야 한다. 그러나 많은 다른 부분은 반드시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역시 분명히 증거적이다. 심지어 전천년설 주창자들도 많은 표현들을 상징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넌센스가 되고 만다. 성경이 그 내용의 무엇이 문자적이고 무엇이 비유적인지(상징적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견고하고 신속한 법칙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료의 성격과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스타일과 목적을 연구해야 하며, 그때 더 좋은 용어의 결핍에 대해 우리가 "상식을 성화한다"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의지하게 된다. 우리들은 모두 생각하는 것이 같지 않고, 보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결론은 개인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참된 후천년설이 내내 초자연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거의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전천년설과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때때로 후천년설을 인문주의적 및 진화론적 과정을 통한 세상의 회심을 가르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주의는 초자연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수단에 의해서 세상의 향상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때때로 어떤 반대자들은 후천년설을 마치 현대주의인양 이야기한다. 무리한 상상으로도 그와 같은 체계가 후천년설이라고 불릴만한 어떠한 도덕적 진리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후천년설이란 용어가 역사적으로 사용되어진 의미가 아니다. 그와 같은 류의 주석은 너무 부당한 비평이다. 후천년설을 대표하는 신학자들인 어거스틴, 브라운, 핫지(Hodge), 다브니(Dabney), 그리고 워필드(Warfield) 같은 이들은 초자연적 역사를 믿는 이들이었으며, 성경의 백퍼센트 영감과 권위를 그리고 개개인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성령의 중생의 사역을 믿는 이들이었다.
한편 오늘날 현대주의의 특이한 형태는 초자연적 역사를 크고 작게 계속 부정하고 있으며, 성경의 완전한 영감,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피의 구속, 기적, 최후의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부정한다. 그것은 최우선적으로 이 세상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교육, 사회, 경제적 진보, 개선된 건강, 자금과 노동사이의 개선된 관계 등을 통한 세상의 개혁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진척되기만 하면 좋은 것들이며, 가능하다면 권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직 참된 기독교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관한 다른 견해들이 주장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진리탐구를 위한 참된 노력을 막아서는 안 된다. 신학분야에서의 이러한 상황은 의학의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이 분야에서도 훌륭한 의사들이 일정한 병에 대해 어떻게 치료를 가해야 한다든지 어떻게 인체는 보존되어야 한다든지 하면서 각기 다른 견해를 취하고있다. 예를 들자면, 의사도 있고, 척추교정지압가도 있고, 정골요법의사도 있고, 외과의사도 있고, 식이요법전문의도 있고, 신체운동을 열심히 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건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데 저해 요소가 되지 않으며, 건강유지를 위해서 최상의 방법을 찾는데 방해요소가 되지 않으며, 설사 우리가 잘못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부터 당하는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치 않는다.
정치나 정치적 수완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정당을 가지고있다. 공화당도 있고, 민주당도 있고, 사회주의, 노동당 심지어 공산당도 있다. 각 당은 어떻게 국가가 다스려져야 하는가에 대한 각기 다른 원리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선거 때에 매우 투쟁적인 다른 견해들을 듣는다. 교육과 교회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다. 이들 각각의 측면에서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고 가능하다면 과실에서 진리를 구별해 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일획에 의해서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문제들에 관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삶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경을 영감과 권위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의견의 차이들이 논쟁을 위한 토대나 정통의 시비로(tests of orthodoxy) 삼기보다는 오히려 선입견 없는 주석과 우호적인 토론으로 언제나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일반적인 법칙으로써,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더 그들의 견해를 기초하고 있는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들의 체계를 수용하지 않는 자들은 성경에 대한 낮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변함 없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느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독자는 전천년설 저술을 통해서 오직 그들만이 주의 재림을 완전히 믿는 것 같은 인상을 쉽사리 받을 것이다.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몸소 다스리는 지상왕국에서의 통치에 의문을 던진다면,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습니까?"와 같은 질문에 봉착하게 될 것이며, 이는 일부 시대구분론적 학파에서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이들 성경대학들의 요강을 보면 대부분이 전천년설을 믿는 자들에 한해서 교수 요원을 채용하고 있다. 어떤 학교는 학생이 이 견해를 수용치 않을 경우 졸업시키기를 꺼리며, 적어도 그에게 나쁜 점수를 줄 것이다. 예언 협의회 서적에는 일방적인 미래주의를 제시하고있고, 반대 견해는 복음주의가 아니라는 추론을 권장한다. 어떤 학자는 전천년설을 취미삼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거의 모든 예언, 환상 그리고 약속에서 특이할만한 재간으로 전천년설의 주장을 끌어내어, 설교를 통해 과도하게 그것을 주장한다. 그레이(Gray)는 적어도 300개 이상의 신약성경의 참고 구절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두고 있다. 그리고 몰간(Morgan)은 신약성경에서 평균 25절에 한 절이 전천년설을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본질적인 요소로(nonessentials) 취급되어야할 후, 무, 전천년설 주창자들 사이의 차이가 실제로 교회를 분단시키고 있고, 기독교인 교제(Christian fellowship)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시대구분론적 극단주의자들의 변덕들이 - 여호와 증인, 천년왕국의 서광을 부르짖는 자들(Millennial Dawnists),[역자주: Millennial Dawn은 여호와 증인의 창시자인 찰스 태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이 쓴 일련의 조직신학서 임.] 몇몇 오순절 거룩교 그룹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에도 있다 - 그리스도인들을 불가지론 그룹으로 분단시켰고, 기독교의 대의(大義)에 많은 해를 끼쳤다.
이들 문제들을 의논함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꼭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1)복음주의적 후천년설, 무천년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성경이 완전한 영감과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의 성격에 관해서 다르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내용에 있어서 다르다. 2)세 가지 천년설 모두 다 예수의 초림을 믿고 있고, 재림이 있을 것을 믿으며, 이 재림은 친히 볼 수 있게, 영화스럽게 그리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와 같이 객관적일 것을 믿는다.
교회는 토론해 왔고, 결론에 도달했으며, 믿음의 다른 위대한 가르침(교리)으로써 교회의 신조에 이들 결론들이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 첨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말론의 주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그리스도께서 세우고 계시는 왕국 또는 이 세상에 세우실 왕국의 종류는 일치된 의견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적으로 모든 분파에 있어서 교회는 왕국 해석들의 어느 하나도 신조의 조항에 포함시킬 것을 거절하였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건을 믿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인 형제로써 수용할 것을 오히려 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방법과 시간에 관하여는 매우 분명한 견해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구호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 모든 일에는 사랑"이 되어야 할 것 같다.[역자주: 보에트너(Boettner) 박사가 제안한 구호는 1809년 그리스도 교회의 시조인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이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 of the Christian Association of Washington)에서 교회의 분열을 막고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교회가 연합할 것을 제안한 내용으로써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통적인 구호가 되고 있다.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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