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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릇을 채우시는 하나님[왕하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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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7,387 2002.09.14 17:19

본문

오늘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840여년 전 아합의 아들 요람이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야훼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바알을 섬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 죄값으로 아합은 전쟁터에서 활에 맞아 주고, 그 피를 개들이 핥았습니다. 이 때까지가 선지자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을 대신해서 그의 아들 요람이 왕위에 오르고, 엘리사가 엘리야를 대신해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선지자가 된 엘리사는 장군 예후를 북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아합의 아들 요람과 이세벨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 이스라엘에서의 바알 숭배 정책은 무너지고 야훼신앙이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 4장의 말씀은 이런 혼란의 때에 발생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진 사울 왕 때부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전 사무엘 선지자 때부터 요즘의 신학교 비슷한 선지학교가 시작된 모양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엘리사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도 선지 생도의 부인이었습니다. 선지 생도가 죽고 돈벌이는 없는 데다가 빚쟁이들이 몰려와 두 아들을 종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엘리사에게 알리고 도와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선생님의 종인 저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주를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준 사람들이 몰려와서, 저의 두 아들을 자기들의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엘리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집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그 때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기름 한 병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마을에 나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빈 그릇들을 빌려 오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그릇을 빌려다가 방에다 채우십시오. 그리고 그 빈 그릇에다 기름을 부어 가득 채우십시오." 선지 생도의 부인은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했습니다. 방안에는 빈 그릇들이 가득 찼고, 그 그릇들은 기름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신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병의 기름이 온 그릇을 가득 채울 때까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듯 멈추지 않고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빌려온 그릇이 다 채워졌을 때에는 기름도 멈추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난관에 직면했던 한 부인이 하나님께 매달려 응답 받은 몇 가지 신앙의 원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련을 통해서 성숙해지고 발전하기를 바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통을 겪도록 허락하십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선지 생도는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찍 죽었고 남은 가족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남겨 놓았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두 아들이 노예로 끌러갈 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 여인의 유일한 희망인 두 아들까지 빼앗길 참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상태가 이쯤 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주의 종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보아야 쓸모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예수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믿음의 고백으로 마칩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처럼,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로 시작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로 마칩니다.
다형 김현승의 시 가운데 [눈물]이란 시가 있습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 .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다형 김현승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광주 숭일학교, 조선대학교, 숭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6.25 전쟁이 끝날 무렵에 네 살 짜리 아들을 잃었습니다. 결핵성 뇌막염으로 변변히 약도 써 보지 못한 채 자식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이 시를 썼습니다. 이 [눈물]에서 시인은 아들을 잃은 엄청난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하고 있을 뿐아니라,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김현승은 [나의 시, 그 변모의 과정]이란 글에서 "인간이 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순수해지고 진실해지는 순간은 가장 큰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이 때 흘리는 눈물은 헤픈 웃음이 아니라 참회의 눈물입니다.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는 감사의 눈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 눈물이며, 가장 나중까지 지니기를 원하는 것도 눈물이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들고 마는 꽃 대신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견고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처럼, 변하기 쉬운 웃음 대신에 삶의 깊은 차원을 깨닫게 해주는 눈물을 만들어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눈물을 하나님의 은총이라 믿고 슬픔의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눈물은 옥토에 떨어진 작은 생명이며, 흠도 티도 금도없는 가장 값진 열매 즉 제 2의 성장을 위한 열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둘째, 선지 생도의 부인에게 마지막 남은 한 병의 기름이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가진 가장 보잘것없는 것도 축복의 도구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의 빈배를 사용하신 후에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한 소년의 점심 도시락으로 오천명 이상의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주의 종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드려졌을 때에 여러 날 먹도록 줄어들지 않은 기적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예비하신 다음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머리가 나쁘면 나쁜 대로, 못생겼으면 못생긴 대로, 넉넉하면 넉넉한대로, 머리가 좋으면 좋은 대로, 잘생겼으면 잘생긴 대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찬송가 349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는 가난으로 인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그래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던 한 소녀가 하나님 앞에 바친 애절한 기도, "오 주님 부족한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를 기초로 해서 쓰여졌다고 합니다. 이 소녀와 같은 신앙자세가 바로 하나님께 축복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 . .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셋째, 하나님은 빈 그릇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선지 생도의 부인의 방안에는 많은 빈 그릇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그릇들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는 갈릴리 가나의 잔칫집에 참석해서 비어 있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의 빈배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갈릴리 빈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진 빈배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는 육신적으로 병들어 있고 정신적으로 메말라 있는 민중의 아픔과 슬픔에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께서 보실 때에, 병고침, 위로, 사랑, 빵 등으로 채워져야 할 빈 그릇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 이 천년전 빈들을 헤맸던 민중들처럼 위로와 사랑과 은혜로 채움받아야할 빈 그릇들은 아닙니까? 선지 생도 부인의 골방에 채워진 빈 그릇들처럼 성령의 기름으로 가득 가득 채움 받아야 할 사람들은 아닙니까?
빈 그릇은 가볍습니다. 빈 그릇은 속이 비어 있습니다. 빈 그릇은 소리가 요란합니다. 빈 그릇은 가난한 이들의 그릇입니다. 빈 그릇은 병든 이들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빈 그릇은 깨끗합니다. 빈 그릇은 겸손합니다. 빈 그릇에는 애절함이 있습니다. 빈 그릇에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빈 그릇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넷째, 선지 생도의 부인의 순종의 믿음은 결국 기적을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믿음으로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때에 골방에 채워진 빈 그릇들은 기름으로 가득 가득 채워졌습니다. 예수는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에게 명령하여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한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원리 한 가지는 선지 생도의 부인이 가진 것은 비록 기름 한 병뿐이었지만, 그것을 빈 그릇에 나누어 줄 때에 많은 빈 그릇들을 채울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빈 그릇에 기름을 붓는 일은 여인이 믿음으로 행한 일이었지만, 한 병의 기름으로 많은 빈 그릇들을 채우신 분은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인이 행한 일은 믿음으로 빈 그릇을 모으는 일이었지만, 많은 빈 그릇들을 채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선지 생도 부인이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마을에 나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그릇들을 빌려다가 방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 빈 그릇에다 기름을 부어 가득 채웠습니다. 그 때에 그녀는 필요한 만큼의 돈을 마련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행한 일은 빈 그릇을 모우는 일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들에게 자신이 가진 얼마되지 아니한 기름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때에 그녀의 가진 기름이 소모되어 없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풍성히 넘쳤다는 점입니다. 잠언 11장 24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돈이든지, 사랑이든지, 지식이든지, 시간이든지, 노동력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그것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필요로하는 빈 그릇들에 쏟아 부어 줄 때에 그들의 빈 그릇들이 넘치게 채워짐으로서 큰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쏟아 부어주는 사람 역시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이것이 심고 거두는 원리입니다.
선지 생도의 부인은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나님의 종에게 찾아갔습니다. 선지 생도의 부인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에게 찾아간 것은 하나님의 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술사의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문제 해결의 방법을 하나님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문제 해결의 열쇠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형 김현승 시인의 고백처럼 '나의 전체,' '더욱 값진 것,'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이 비록 '눈물'이라 할지라도, 이 '눈물'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인해서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으로 성장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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