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 가지 기도(요 17:1-20)
본문
예수님의 세 가지 기도(요 17:1-20)
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바치신 기도문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듯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은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기도문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절)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20-26)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자는 누가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도하다’는 동사와 ‘기도’라는 명사가 합쳐서 90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절반이 넘는 47번을 누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누가는 다른 어떤 성서저자들보다도 기도생활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요, 누가는 마가나 마태가 보도하지 아니하는 부분인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셨고(3:21-22), ‘기도하실 때’에 변화산의 체험(9:28-29)을 갖게 되셨다고 적도 있습니다. 또 누가는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시작 전에 금식기도(4:1), 병 고친 후에 한적한 곳에서 행하신 자기성찰의 기도(5:16), 제자를 택하기 전에 행하신 철야기도(6:12), 신분(정체성)을 밝히기 전에 행하신 단독기도(9:18),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 행하신 준비기도(11:1), 베드로를 위한 중보기도(22:32), 겟세마네동산에서 행하신 죽음직전의 기도(22:41-46), 십자가상에서 박해자를 위한 기도(23:34), 그리고 임종 전에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기도(23:46)를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간청의 기도(11:5-13), 끈질긴 기도(18:1-8), 그리고 겸손한 기도(18:9-14)의 중요성을 비유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도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놓고 기도하셨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문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영화롭다는 말과 동일시할 뿐 아니라, 이 일로 아들이 아버지를 또한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죽음을 미화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2절과 4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또 아버지께서 하라 하신 일을 이루시려고 예수님께서 희생되는 일이기에 그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요,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아들이 또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일에 더욱 큰 가치를 두셨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의 말씀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또한 동시에 예수님의 것으로 인식하셨습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 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존하여 주실 것과 그들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실 것(11절)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남아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14절) 진리로 거룩하여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17절).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세상이 미워하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14-15절).
성경에서는 세상을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과의 전쟁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력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되는 그릇된 가치관과 비기독교인의 왜곡된 가치관을 말합니다. 그 세력은 실제적으로 존립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대적하여 살도록 사람들을 이끌어 갑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성경의 기준보다는 세상의 요구에 따라 사는 것이 더 편리하고 행복하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것들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부르심을 받은 일군들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란 사실과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근거는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하나 되는 일에 높은 가치를 매기시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름 이름으로 모이거나 ‘하나 되는 일’에 역행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겠으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가치관을 두어야겠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이름에 분명한 정체성을 둬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 이름이요(약 2:7), 오래 전에 예언된 이름이며(사 62:2), 그 예언대로 성취된 이름(행 11:26)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성서시대에 사용된 이름이며 천거된 이름(행 26:28)입니다. 우리는 침례교인(Baptist)도 아니고, 감리교인(Methodist)도 아니며, 장로교인(Presbyterian)도 아니고, 안식일교인(Adventist)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런 이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정하실 새 이름” 그리고 “아름다운 이름,” 그 이름은 ‘그리스도인’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인일 뿐(Christians only)입니다.
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의 이름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둬야 하며, 이 이름으로 하나 되는 일에 가치를 둬야 합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요, 마땅하고 옳은 일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은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분열은 죄악입니다. 에베소서 4장 4-6절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분이시오,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가 아닌 것은 분열이요, 분열은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이 분열을 염려하시며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바치신 기도문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듯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은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기도문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절)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20-26)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자는 누가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도하다’는 동사와 ‘기도’라는 명사가 합쳐서 90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절반이 넘는 47번을 누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누가는 다른 어떤 성서저자들보다도 기도생활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요, 누가는 마가나 마태가 보도하지 아니하는 부분인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셨고(3:21-22), ‘기도하실 때’에 변화산의 체험(9:28-29)을 갖게 되셨다고 적도 있습니다. 또 누가는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시작 전에 금식기도(4:1), 병 고친 후에 한적한 곳에서 행하신 자기성찰의 기도(5:16), 제자를 택하기 전에 행하신 철야기도(6:12), 신분(정체성)을 밝히기 전에 행하신 단독기도(9:18),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 행하신 준비기도(11:1), 베드로를 위한 중보기도(22:32), 겟세마네동산에서 행하신 죽음직전의 기도(22:41-46), 십자가상에서 박해자를 위한 기도(23:34), 그리고 임종 전에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기도(23:46)를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간청의 기도(11:5-13), 끈질긴 기도(18:1-8), 그리고 겸손한 기도(18:9-14)의 중요성을 비유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도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놓고 기도하셨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문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영화롭다는 말과 동일시할 뿐 아니라, 이 일로 아들이 아버지를 또한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죽음을 미화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2절과 4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또 아버지께서 하라 하신 일을 이루시려고 예수님께서 희생되는 일이기에 그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요,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아들이 또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일에 더욱 큰 가치를 두셨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의 말씀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또한 동시에 예수님의 것으로 인식하셨습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 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존하여 주실 것과 그들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실 것(11절)을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남아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14절) 진리로 거룩하여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17절).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세상이 미워하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14-15절).
성경에서는 세상을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과의 전쟁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력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되는 그릇된 가치관과 비기독교인의 왜곡된 가치관을 말합니다. 그 세력은 실제적으로 존립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대적하여 살도록 사람들을 이끌어 갑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성경의 기준보다는 세상의 요구에 따라 사는 것이 더 편리하고 행복하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것들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부르심을 받은 일군들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란 사실과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근거는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하나 되는 일에 높은 가치를 매기시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름 이름으로 모이거나 ‘하나 되는 일’에 역행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겠으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가치관을 두어야겠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이름에 분명한 정체성을 둬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 이름이요(약 2:7), 오래 전에 예언된 이름이며(사 62:2), 그 예언대로 성취된 이름(행 11:26)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성서시대에 사용된 이름이며 천거된 이름(행 26:28)입니다. 우리는 침례교인(Baptist)도 아니고, 감리교인(Methodist)도 아니며, 장로교인(Presbyterian)도 아니고, 안식일교인(Adventist)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런 이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정하실 새 이름” 그리고 “아름다운 이름,” 그 이름은 ‘그리스도인’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인일 뿐(Christians only)입니다.
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의 이름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둬야 하며, 이 이름으로 하나 되는 일에 가치를 둬야 합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요, 마땅하고 옳은 일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은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분열은 죄악입니다. 에베소서 4장 4-6절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분이시오,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가 아닌 것은 분열이요, 분열은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이 분열을 염려하시며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 이전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1-33) 03.07.02
- 다음글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40) 03.07.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