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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1938.04.10-)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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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051 2016.02.2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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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1938.04.10-) 목사

choi_youngho02.jpg 최용호는 1938년 4월 10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아버지 최기추와 어머니 이채덕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작은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지냈다. 어머니는 신앙이 좋은 분이셨다. 그 어머니를 따라 최용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일본에서 다녔던 교회는 일본인 목사 마쯔바라가 시무하던 오사카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교인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목사님은 헌신적이었고, 분위기는 가정적이었다. 교인들 가운데 아무도 한국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최용호는 해방된 1945년에 7살이었다. 일본에서의 삶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고국에 돌아가 살아야한다며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존포리 섬마을로 돌아왔다. 최용호는 안좌도 바닷가 마을 존포리에서 일 년간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외진 섬에서 벌이가 마땅치 않자, 이듬해인 1946년에 목포로 이사를 하였다. 최용호는 자연스럽게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아직은 우리말이 서툴렀던 최용호는 처음 일 년 동안 다른 학생들로부터 많은 놀림을 당하였다.

최용호는 어머니를 따라 목포 온금동교회에 출석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25가 터졌으나 이듬해 1951년 2월 28일에 무사히 졸업하였다.


choi_youngho04.jpg 최용호는 1951년 3월에 목포제일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녔고, 1954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다녔던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녔다. 이때 최용호는 어머니와 함께 목포 양동장로교회(당시 이남규 목사 시무)에 출석하였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choi_youngho05.jpg최용호는 목포상고 재학 때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그 때문에 그는 친구들에게 외국어를 잘하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각인되었다. 외국어에 대한 관심은 훗날 잠깐 동안이었지만 목포에 있는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성서신학교(한성신학교, 한민학교)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 교수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전 총회장이자, 전주중앙교회를 시무했던 김옥남 목사는 최용호 목사의 목포상고의 동기동창으로서, “최용호는 고등학교 때부터 신앙이 좋은 신실한 학생이었으며, 특별히 외국어에 능통한 학생이었다.”고 증언하였다.


 


 


choi_youngho01.jpg1955년 무렵 목포지역에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특히 김은석 목사, 최요한 목사, 이신 목사 등이 인도하는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이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불이 임하여 초대교회에서처럼 능력과 놀람과 표적이 나타나고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곤 하였다. 최용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어느 날 김은석 목사가 인도하는 사경회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던 중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요 3:5)는 말씀에 붙잡히는 강력한 은혜를 체험하였다.




이 무렵에 목포 차남수병원 원장부인인 김사라 집사가 고질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최요한 목사의 기도로 고침을 받고 복음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1955년 9월 20일 목포시 북교동 정분임 집사 가정에서 시작하여 10월 16일 차남수 병원 안집을 개조하여 예배를 드렸다. 최요한 목사는 1946년 초에 김은석 목사에게 은혜를 받고 다수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세웠다. 또 1951년 늦봄에 광주에서 개최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 창립총회 때 목사 안수를 받고 장성기도원을 맡아 8개월간 사역하였다. 1952년 1월초에는 목포시 남교동 큰 시장 골목상가 2층을 전세 내어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나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교단을 옮겨 목포시 죽교동 391번지 진성구 장로의 건물 2층에 유달교회를 개척하였다. choi_youngho07.jpg그러나 최요한 목사는 이 유달순복음교회 예배당에서 김은석, 이신 등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회’(신학교)를 운영하였다. 1955년 9월 25일부터는 김사라 집사가 개척한 지 5일밖에 안 된 복음교회를 맡아 시무하였다. 복음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기공예배를 드리고 예배당 건축이 된 상황에서 교회명칭에 대해 고민하던 중 최요한 목사는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로 정하기를 원했고, 제직자들의 투표에서도 그렇게 결정되었으나 창립자인 김사라 집사측과 교회명칭으로 인해서 갈등이 커졌다. 이에 최요한 목사는 1957년 10월 5일에 복음교회를 사임하였고, 9월말부터 목포시 대안동 11번지에 마련한 예배처소에서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다. (목포복음교회는 지금도 침례와 주의 만찬을 소중히 여기는 독립교회로 남아있다.)

김은석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 때 큰 은혜를 체험한 최용호와 모친은 유서 깊고 전통 있는 양동장로교회를 떠나 김사라 집사가 개척하고 최요한 목사가 시무하는 복음교회로 옮겼다. 양동교회에서는 학생회 회장을 하던 학생이 교회를 옮겼다며 논란이 일었다. 최용호는 복음교회로 옮긴 후 1956년 여름 목포 대방동 바닷물에서 최요한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고, 최요한 목사의 지도아래 목포상고 3학년 때 목포복음교회에서 학생회장을, 졸업 후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의 창립교인으로서 청년회장을 맡아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다. 젊은 최용호를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사와 신학교 교수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지도하고 중매하여 주례까지 서준 최요한 목사는 설교 때마다 열정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였고, 매주 행하는 성만찬 때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촉구하였으며, 절절한 성만찬기도에 많은 이들이 은혜를 받았다. 최용호 목사는 청년 때 최요한 담임목사와 김은석 목사로부터 받은 신앙체험들을 소중히 간직하여 목회생활에 적용하였다.

choi_youngho06.jpg목포복음교회 학생회장이었던 최용호는 유달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이날 설교 후 최용호는 진성구 장로에게 유달교회와 복음교회가 통합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는데, 결국 진성구 장로가 큰 힘이 되어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다. 진성구는 장로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이로서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중에 최요한을 만나 1952년에 상월리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고, 1953년에는 목포에 있던 자신의 건물 2층을 유달 교회당으로 쓸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57년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될 때에는 창립교인으로서 전 가족이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1968년에 목포복음교회로 이적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는 개척 이듬해인 1958년에 적산가옥을 개조하여 예배당 16평, 사택 10평을 마련하였다. 이 가옥은 크기가 200평이나 되는 건물로써 교회가 차지한 공간은 왼쪽 가장자리 26평이었다. 1961년에 이 가옥 뒤편 24평을 구매하였다. 이에 최요한은 50평 크기의 석재건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반대하여 1968년에 진성구 협동장로가, 1969년에는 세 명의 장로들이 목포복음교회로 이적하였다. 최요한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50평 석재 본관건축을 착공하였다.

최용호는 목포상고 졸업 후 목회에 뜻을 두고 1957년 4월 7일부터 현재 서울 노원구에 소재한 한국성서대학교(학장 강태국 박사)에서 1958년 7월 15일까지 1년 반을 수료한 후 군에 입대하였다. 이 시기에 대전의 한국성서신학교(1959년 12월 개교)는 아직 개교이전이었고, 서울 송월동 신학교는 캠퍼스 이전준비로 임시 폐교된 상태에서 1959년 6월 3일 팔렸으며, 1963년 3월에 가서야 새 캠퍼스(현 은평구 서울기독대학교)에서 서울성서신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되었기 때문에 최용호 목사가 입학할만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가 없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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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는 1959년 8월 21일 육군으로 입대한 후에 39사단에서 포병단 인사과와 사단병참 참모부에 근무하였고, 하사로 1962년 5월 3일 제대하여 당시 김은석 목사가 자주 집회를 열었던 해남의 마명리 그리스도의 교회(담임 김중현 목사)에 출석하던 박정자와 1963년 2월 22일 최요한 목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동년에 최용호는 담임목사 최요한의 권유로 대전에 세워진 한국성서신학교(교장 힐 요한 선교사) 본과 3학년에 편입을 하였다. 당시 교수로는 힐 요한 선교사, 힐 제인 선교사, 임춘봉 목사, 최요열 목사(최요한 목사의 동생이자, 조동호 목사의 초중고시절 담임목사), 이신 목사, 심영진 목사, 김희영 교수가 가르치고 있었다. 최용호 목사가 한국 선교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교장 힐 요한 선교사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choi_youngho09.jpg한국성서신학교는 1959년에 개교하였기 때문에 1963-64년 당시에는 변변한 교사도 갖추지 못한 열악한 환경에서 수업이 이뤄졌다. 이뿐 아니라, 재학생들의 대다수가 생활이 어려워 학교에서 제공하는 근로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이 무렵 신학교들은 신학을 공부하는 학교이자 학비를 해결하는 노동현장이었다.

최용호는 1964년 12월 18일 본과 2회로 한국성서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바로 모 교회인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로 내려가서 교육전도사로 일하였고, 1965년에 진도 대사리에 소재한 대사 그리스도의 교회에 초빙되어 전도사로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대사 그리스도의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였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한국성서신학교 교수였던 이신 목사가 1966년 9월 마흔 살의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칠 후임으로 초빙을 받아 1966년 3월 31일 한국성서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최용호 교수는 동년 9월 18일 전주 금암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아 시무하는 동안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30여명의 성도를 섬기며 역시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으며, 이듬해인 1967월 9월 5일 신학교 강당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choi_youngho11.jpg최용호 교수는 한국성서신학교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면서 대전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들에서 목회를 겸하였다. 이뿐 아니라, 1980년 3월 12일 침례신학대학 목회대학원에 입학하여 1982년 2월 16일 목회학석사를 받았고, 1985년 2월에는 45살의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소재 윈스턴세일럼 성서대학에서 1986년 8월 17일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동년 9월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동석기 목사, 장성만 목사, 김찬영 목사, 조동호 목사 등이 수학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성서대학원에 입학하여 1988년 5월 7일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으며, 한성신학교에 복직하여 가을학기부터 구약학교수로 재직하였다. 한성신학교(한민학교)에서는 신학과장을 비롯한 여러 보직을 두루 맡아보았고, 이외에도 1980년 5월 1일부터 성령학원에서 감사직과 1998년 9월 19일부터 재단법인 한국 크리스챤 밋숀 이사직을 다년간 역임하였다. 최용호 교수는 한성신학교가 한민학교로 바뀌고 3년이 지난 2003년 8월 31일 신학부 정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퇴임 후 다락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던 중에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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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 목사는 학창시절 김은석 목사와 최요한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목회자로서 침례와 매주 행하는 주의 만찬을 매우 중요한 의식으로 인식하고 시행하였다. 또 그는 미국 유학기간을 뺀 33년간 신학교에서 구약성서 과목들과 성서언어를 가르쳐온 교수로서, 휴대용 돋보기로 포켓용 헬라어신약성서를 읽었으며, 신약성서교회로의 회복(환원)이 왜 그토록 중요한 기독교개혁의 과제인지를 강조해왔다.

박정자 사모 또한 청년 때 김은석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는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긴 그리스도의 일군이었고, 가난과 역경과 온갖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한 오남매의 사랑스런 어머니였으며, 모든 교우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모였다. 슬하에 3남(준오, 준곤, 준기)과 2녀(미애, 은애)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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